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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匠人’을 찾아서] 중요무형문화재 ‘승무’·‘살풀이춤’ 이매방 선생

'한국 무용계의 살아있는 전설.'

우봉(宇峰) 이매방 선생은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와 제97호 살풀이춤을 전승한 한국 최고의 춤꾼이다. 전통춤의 계승과 더불어 한국 춤 형태를 과학적으로 재정립한 1세대이다. 20세기와 21세기를 잇는 한국 전통춤의 가교 역할을 하기도 한다.

지난달 28일 서울 양재동의 한 빌라로 이매방 선생을 찾았다. 10여분 뒤 이 선생은 보라색 계열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기자를 맞았다. 손님이 온다고 대중목욕탕에도 다녀오고 가발 쓰고 염색까지, 말 그대로 꽃단장이다. 양복 입은 사람들은 소파에 앉고 한복 입은 자신은 방바닥에 앉아야 옷매무새가 나온다며 굳이 소파를 권했다. 햇볕이 따스하게 비껴드는 거실 베란다 창문 옆에는 미제 '싱어(SINGER)' 재봉틀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 재봉틀은 120년도 넘은 거예요. 어머니가 시집올 때 혼수로 해 왔던 것이지."

공연을 앞두고 늘 제자들의 의상과 소품을 손수 준비해 온 노(老) 무용가는 요즘도 틈틈이 재봉틀을 잡는다.

"죽을 때가 다 됐지만 아직도 무대는 무서운 곳이란 생각이 들어. 요새 애들은 소꿉장난같이 생각하지만 예인(藝人)에게 무대는 사형대나 마찬가지야. 무대를 준비하려면 춤만 잘 추면 되는 게 아니라 바느질부터 음악 준비까지 다 잘해야지. 내가 죽으면 이런 거 직접 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봉은 10여년 전 위암 수술을 받았다. 70이 넘은 나이에 위의 대부분을 모두 들어내는 대수술을 받은 것. 그리고 60㎏이던 몸무게가 44㎏으로 줄었다. 그럼에도 우봉은 여전히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속 무대에 오른다. 지난 8월 말엔 고희를 앞둔 부인 김명자씨의 공연무대에 올라 관객들을 놀라게 했고 갈채를 받았다.

우봉은 빌라에서 조교 백경우씨와 단둘이 기거한다. 부인 김씨는 부산 범일동에서 '이매방 춤 전수관'을 운영하고 있다. 승무와 살풀이춤의 전수교육 보조자이기도 하다. 주말이면 부인 김씨가 서울로 올라온다.

"수술 후 기력이 예전만 못해. 무대에 오를 때 20분 정도 공연하던 승무는 10분 그리고 17분여 공연하던 살풀이춤은 8분 정도로 시간을 줄였어." 그러나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하다.

"내 별명이 따발총, 욕대장, 술고래, 골초, 직사포 다섯개야."

'직사포'답게 우봉은 말문이 터지자 거침이 없었다. 그는 무형문화재 제도의 문제점에 대해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비난했다.

"일본 사람이 그러더라고. 한국에는 무슨 무형문화재가 그리 많으냐고. 정말 너무 엉터리 가짜 문화재가 많아. 어떻게 춤 스타일이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선생의 춤 보유자로 지정받느냐고. 어느 게 진짜 문화재야? 얼마 전에는 나한테 두세 달 배우고 간 사람이 '승무'로 지방에서 문화재로 지정받더군."

"내가 죽으면 다들 제 맘대로 춤출 놈들이야. 그렇게 배우려고 하다가도 문화재 '이수증'만 타면 더는 안 오는 놈들이 하나둘이 아니야. 나처럼 평생 외길로 춤만 생각해도 될까 말까 한데. 다들 어떻게 하면 박수를 받을까, 명예를 얻을까, 돈을 벌까 궁리만 해. 그런 정신 갖고 무슨 춤을 춘다고 해.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고운 법이여."

―이매방(李梅芳)이란 이름이 독특하고 이쁘다.

▲일제 강점기 누님과 매형이 중국 베이징에 살았다. 당시 만주에서 학교에 다녔던 난 방학 때 누님 댁에 들러 당대 최고 중국 경극배우 매란방의 공연을 보게 됐다. 남자인 매란방이 천하일색 양귀비로 변장해 춤 추고 연기하는 것에 매료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란방에게 장검무와 등불춤을 배웠다. 매란방 선생을 흠모해 이름 가운데 '란'자를 빼고 매방으로 예명을 지었다. 그 후 호적 이름까지 규태에서 매방으로 바꿨다. 이름 석자가 모두 꽃을 뜻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릴 무렵 우연히 중국에 들러 매란방 선생의 춤을 보여줬더니 가르쳐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문화대혁명으로 매란방 선생 춤의 대(代)가 끊겨 버린 것이었다. 지금까지 춤을 놓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성의 몸으로 섬세한 몸짓과 정교한 춤사위를 소화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한국 전통춤엔 남성적, 여성적 춤사위가 동시에 내재돼 있다. 선이 굵고 힘이 있는 반면 감정 표출이 잔잔하게 일어난다. 이런 춤사위를 대삼(大衫), 소삼(小衫)이라 한다. 여성과 남성 춤사위를 구분하지 않는 것이 한국 춤의 특징이기도 하다. 남성 춤의 강점은 경제적, 사회적 어려움을 딛고 예술세계에 매진하는 데서 나오는 강인함이라고 생각한다.

-70년이 넘는 춤 인생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공연은.

―1980년 초반 영국의 세계적인 무용가 마고트 폰테인 앞에서 승무를 추던 일과 1990년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공연한 것이다. 세계 각국의 예술인들이 한국 춤을 그토록 좋아할 줄 몰랐다.

―음양의 조화가 깃들어 있다는 '이매방류(流)'의 특징을 설명해 달라.

"음양의 미는 심리적, 내적 갈등을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자제할 때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장삼을 크게 한 번 부리면 그 다음은 작게 하고 호흡을 위로 한 번 올리면 다시 아래로 내려주며, 감으면 풀고 풀면 다시 감는 음양사상이 춤의 기본 틀을 이룬다. 또 춤의 시작부터 끝까지 정지 상태가 없으며 춤 동작의 끝은 반드시 다음 동작의 시작으로 이어가게 함으로써 양이 차면 음이 되고 음이 차면 양이 되는 원리를 갖추고 있다. 매번 이 원리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한국 전통춤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승무도 500여년 전에 신방초 선생이 창작한 춤이야. '장검무'는 매란방에게 배운 춤사위를 바탕으로 내가 창작했고. 한국 춤이 발전하려면 창작이 중요하지. 그러나 이를 위해선 우리의 전통춤을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우선돼야 해. 그래서 정부의 행정적, 재정적 지원이 필요한 거지.

―한국 전통춤의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한국 전통춤의 멋은 기와지붕이나 한복의 선처럼 곡선의 아름다움이지. 직선의 움직임이 기본인 서양춤이나 최승희류의 신무용은 명랑하고, 활발하고, 밝고, 박력은 있지만 한국 전통춤에서 볼 수 있는 뭔가 찌르르하고, 요염하고, 이상야릇한 기운이 없어.

/mskang@fnnews.com강문순기자

인터뷰 동영상 tv.fnnews.com

■'호남예술의 거장'으로 일컬어지는 우봉 이매방은 어릴 적 집에 전남 목포의 권번장(券番長) 함국향이라는 기생이 세 들어 살아 자연스럽게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곱 살부터 6년간을 권번 기생들 틈에 끼여 입춤 등 전통 춤의 기본을 깨쳤다. 집안에는 가무를 즐기는 부모가 있었고 할아버지 이대조는 권번에서 기생들을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당시 소학교 때부터 '춤추는 머시마'로 불리던 그가 본격적으로 춤을 배우게 된 것은 열두살 때 배구자 무용단의 공연을 구경하면서부터 우연히 그의 재주가 눈에 띄어 무대에 오른 이후 임방울과 인연을 맺어 전국을 누비며 춤판을 벌였다. 1960년대 '3고무, 5고무, 7고무' 등을 창안해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뼈를 깎는 노력과 불같은 열정으로 그는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과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가 됐다.

한국 무용계를 이끌어가는 대가들 중 상당수가 그의 춤을 전수한 제자들이다. 한국 무용을 배우거나 가르치는 사람 중에 이매방 선생의 영향을 안 받은 사람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무용 교수들은 다 제자라고 보면 돼, 제자의 제자 또 그 제자까지 하면 수만명쯤 될 거야."

■이매방 선생 약력△83세 △전남 목포 △이대조·박영구·이창조 선생 등에게 승무와 법고, 검무 등 배움(1935∼1939년) △목포공립고(194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예능보유자(1989년) △제97호 살풀이춤 예능보유자 지정(1990년) △인간문화재진흥회 부회장(1993년) △용인대 무용학과 교수(1996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1998년) △21세기 문화예술진흥회 고문(1999년)

■사진설명=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와 97호 살풀이춤을 전승한 한국 무용의 살아있는 전설 우봉 이매방 선생이 제자들의 연습시간에 장구를 치며 장단을 맞춰주고 있다. /사진=김범석기자

■중요무형문화재 27호 ‘승무’

승무는 승복을 입고 추는 춤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속춤 가운데 하나다. 승무는 흔히 중춤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불교의식에서 승려가 추는 춤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승무의 유래는 불교문화사적 입장에서 본 불교설과 김만중 소설 중 구운몽에서 나왔다는 설, 탈놀음 중에서 노장춤과 파계승의 번뇌가 낳은 춤이라는 설이 있으나 어느 것이 확실한지 단정할 수는 없으며 1910년대쯤 기방에서 발전되었다고 한다. 춤의 형태는 의식성이나 종교성, 생산성, 극성, 놀이성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홀춤(獨舞·독무)으로 춤사위가 살풀이춤과 유사함을 지니고 있어 기녀들에 의해 예술적인 춤의 형식이 갖춰졌다고 보인다.

승무는 흰 장삼에 붉은 가사를 걸치고 백옥같은 고깔과 버선코가 유난히 돋보이는 차림으로 염불, 도드리, 타령, 굿거리, 자진모리 등 장단의 변화에 따라 춤을 춘다. 소맷자락을 뿌리는 동작이나 휘날리게 하는 팔 동작은 매우 특이하며 반주로는 피리, 대금, 해금, 장구, 북이 사용된다.

승무는 달고 어르고 맺고 푸는 리듬의 섬세한 표현과 중춤이 갖는 춤사위의 오묘함이 조화된 매우 우수한 춤으로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높은 차원에서 극복하고 승화시킨 이지적인 춤이라 할 수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97호 ‘살풀이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해의 나쁜 운을 풀기 위해 굿판을 벌였는데 그곳에서 무당이 즉흥적으로 나쁜 기운을 푸는 춤을 춘 것을 살풀이춤이라 하며 '도살풀이춤', 허튼춤'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수건춤, 산조춤, 즉흥춤이라는 이름의 수건춤이었으나 춤꾼 한성준이 1903년 극장공연에서 살풀이란 말을 쓴 데서부터 살풀이라는 이름이 비롯됐다.

춤꾼은 고운 쪽머리에 비녀를 꽂고 백색의 치마 저고리를 입으며 멋스러움과 감정을 한껏 나타내기 위해 하얀 수건을 들고 살풀이 곡에 맞추어 춤을 춘다.
지금의 살풀이춤은 경기지방과 호남지방에서 계승된 춤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조선 중기 이후 나라가 안정되고 서민문화가 활발히 전개되면서부터 광대들의 춤으로 발전하게 됐다. 일제 강점기 때 굿이 금지되자 무당들 중 일부가 집단을 만들어 춤을 다듬으면서 점차 예술적 형태를 갖추게 되어 오늘날 한국춤의 대표로 정착했다.

살풀이춤은 살풀이 가락에 맞춰 슬픔을 품어 환희의 세계로 승화시키는 인간 감정을 아름다운 춤사위로 표현하는 예술적 가치가 큰 고전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