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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업을 이끄는 사람들] 최태지 단장 “한국발레,이젠 세계 무대로..”

까만 투피스에 기다란 진주 목걸이를 걸친 채 볼쇼이 극장 백스테이지로 황급히 뛰어가는 그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돼 있었다. 지난 8일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볼쇼이-국립발레단 첫 합동 무대' 둘째날 공연 직후였다. 공연 전 설렘 가득했던 표정은 어느새 흥분과 기쁨으로 뒤범벅돼 있었다. 백스테이지에서 그는 러시아 관객의 환호를 이끌어낸 주역 무용수들을 차례로 껴안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한국 발레계 최고경영자(CEO) 최태지 국립발레단 단장(51). 공식석상에서 그는 눈에 확 띈다. 재일동포로 일본식 어투가 여전히 남은 한국 말씨. 훤칠한 키에 발레리나 출신의 전유물처럼 보이는 잘록한 허리로 누구를 만나든 몸을 낮춘다. 유쾌한 웃음과 환한 미소 역시 그의 트레이드 마크.

하지만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그의 취향은 허를 찌른다. 정갈한 초밥, 아니면 달팽이 요리를 좋아할 것 같은 인상이지만 된장찌개를 최고 음식으로 꼽는 한식 마니아다. 정장도 2시간 이상 걸치면 숨이 턱턱 막히는 불편함에 발을 동동 구른다. 청바지에 셔츠 하나 걸치는 게 근무 중 공식 의상이다. 이 활동파 복장으로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5층 발레단 사무실과 4층 연습실을 종횡무진 뛰어다닌다. 단원들에겐 한 치의 실수도 허용치 않는 송곳같은 선배이자 사무실 직원들에겐 매사가 철저한 CEO다. 빈틈없는 이 CEO가 사석으로 가면 또 한 번 옷을 갈아입는데 이때 모습은 영락없는 수다쟁이 엄마다.

지난 21일 발레단 사무실에서 만난 최태지 단장은 2주 전 맛봤던 ‘볼쇼이 감동’이 가시지 않은 듯했다.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한국 발레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고 제가 아무리 말해도 사람들이 잘 안 믿었어요. 하지만 이번 볼쇼이 공연으로 입증됐잖아요. 그게 무엇보다 기쁩니다.”

최 단장은 아홉살 때 일본 교토 집 근처 발레학원 선생님의 우아한 자태에 반해 발레를 시작했다. 1985년 한국 발레단과 인연이 닿아 이때 한국으로 건너온 뒤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지도위원을 거쳐 1996년 3대 단장직까지 올랐다. 5년 임기를 마치고 정동극장장으로 옮겨갔고 지난 2008년 공모를 통해 다시 5대 단장으로 국립발레단에 복귀했다.

최 단장은 발레 불모지 한국에서 ‘발레 대중화’ ‘국립발레단의 중흥’을 이끈 숨은 공로자로 평가할 만하다. 처음 발레단장직을 맡았을 때가 그의 나이 서른여섯. 이때만 해도 국내서 발레는 소수 취향의 문화 장르에 지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공연 횟수를 늘리고 발레가 대중에게 쉽게 이해되도록 돕는 것이었다. 1997년 매달 1회 무료로 선보인 국립극장 소극장 발레가 첫 작품이다. 관객은 미어터졌다. 소극장 발레는 3년이나 계속됐다. 야외서도 공간만 있으면 찾아갔다. 시내 중심가 백화점 앞에서도 공연을 선보였다.

“발레가 슈퍼마켓 상품이냐”는 비판도 들었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아기를 둘러업고 까치발로 무용수를 지켜보는 관객을 바라보면 가슴이 뭉클했다. 최근 정부의 국공립기관 초대권 폐지 방침에도 불구, 발레단이 별 타격을 입지 않고 있는 것은 관객 저변이 최근 10년 새 크게 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객석점유율이 시야 장애석이 많은 3층, 4층을 빼면 80%에 육박합니다. 무대가 보이는 좌석은 매진이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발레가 관객과 가까워진 데는 최 단장의 스타 발굴도 한몫한다. 1990년대 중반만 해도 국내서 발레리나라고 하면 강수진(슈투트가르트 수석무용수) 외에 알려진 이가 없었던 게 사실이다. 최 단장이 이때 키운 이들이 현재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지영, 김주원이다. 하지만 국내 무대는 이제 이들의 뒤를 잇는 차세대 스타 무용수들의 발굴도 과제. 최 단장의 고민도 여기에 맞물려 있다. “단장으로서 정부 예산을 따오는 것보다 더 힘든 게 무용수들 캐스팅입니다. 작품 캐스팅을 확정짓기 전엔 저도 피가 말라요. 누구를 주역으로 내세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합니다. 연말 대작들에는 새 얼굴을 많이 기용할 생각이에요. 김리회, 박슬기, 고혜주 이런 무용수들 기량이 보통이 아니에요.”

최 단장은 국립발레단의 실력을 “세계 10위권에 육박하는 수준”이라고 자신했다. 발레학교가 세워진다면 “세계 5위권에도 들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발레학교는 그가 2년 전 단장직을 맡았을 때부터 의욕적으로 추진해온 프로젝트다. 재능 있는 예비 무용수들을 국가가 키우고 최고 기량을 뽐낼 수 있는 나이에 무대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발레학교의 핵심이다.

“우리 발레계 현실은 일반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한 뒤 20대 후반에 직업무용수로 들어와 30대 후반 은퇴하는 것이 보통이에요. 무대에 서는 연령을 낮추고 은퇴하는 무용수들에겐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게 무엇보다 필요합니다. 발레학교가 한국 발레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할 수 있을 거예요.”

단장직을 맡으며 잊을 수 없는 일은 발레계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는 볼쇼이 발레단 상임안무가 유리 그리가로비치로부터 작품을 건네받은 순간이다. 그때가 2000년 봄.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을 비롯, 지난달 초연된 ‘라이몬다’까지 국립발레단의 5대 클래식 작품이 그리가로비치의 작품이다. 중국, 일본 발레계에선 아직 그리가로비치 작품의 저작권이 없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그리가로비치가 아시아에선 한국 국립발레단에만 작품을 허용했다.

최 단장은 국립발레단의 앞으로의 화두는 ‘세계화’라고 말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수들이 세계 쟁쟁한 무대에서 맘껏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제반 여건을 만드는 것이 과제다. 교류 차원에서 세계 대표 무용수들을 국내 무대에 세우는 것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이 의욕 많은 단장의 임기는 올해 말까지. 최 단장은 그래서 요즘 더욱 마음이 바쁘다. “로드맵을 착실히 만들고 있어요. 누가 와도 발레단이 흔들리지 않게요. 내년에 이탈리아 무대에 설 수 있도록 지금 열심히 라 스칼라 극장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jins@fnnews.com최진숙기자

■최태지 국립발레단 단장 약력 △일본 교토 △일본 가이타니 발레 아카데미 △일본 분카 가쿠인 대학 불문학과 △프랑스 프랑게티 발레 아카데미 △미국 조프리 발레스쿨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3대 국립발레단장 △정동극장장 △성균관대 무용학과 겸임교수 △5대 국립발레단장

■사진설명=최태지 국립발레단장은 "한국 발레가 이제 세계 무대를 향해 뛸 충분한 실력이 됐다"며 자신만만해했다.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5층 사무실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최 단장. /사진=박범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