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화가 최영걸 작품 '봄을 찾아서'(finding spring/130x270㎝ 화선지에 수묵담채)는 지난 11월 28일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추정가를 웃도는 37만5000 홍콩달러(5581만원)에 낙찰됐다. |
이날 홍콩 크리스티에서 개최한 '아시아 컨템포러리아트'에 출품된 한국 작가 작품 34점 중 28점이 낙찰됐다. 최고가는 '청바지 작가' 최소영의 'After the Snow'로, 추정가의 2배가 넘는 122만 홍콩달러(약 1억8000만원)에 판매됐다. 또 강형구의 'Warhol in Astonishment'도 104만 홍콩달러(약 1억5000만원)에 낙찰됐고, 김동유·이환권 등의 작품이 한화 1억원 이상에 거래돼 유명세에 도장을 찍었다.
하지만 이날 주목 받은 사람은 서양화 일색속에서 이화익 대표와 밥을 먹고 있던 한국 화가 최영걸이었다. 그는 이날 더욱 늠름해졌다. 홍콩 크리스티 11월 아시아컨템포러리 경매 표지 작가로 등극해 수많은 컬렉터들이 그의 작품을 눈앞에 두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날 경매에 출품한 그의 작품 3점은 모두 낙찰됐다. 작품 모두 추정가를 훨씬 웃도는 가격에 팔려나가 역시 '크리스티가 사랑하는 작가'임이 증명됐다.
홍콩 크리스티 스타 작가 최영걸은 저력 있는 한국 화가다. 매년 반짝하고 타올라 터지는 별똥별이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늘 중심에서 빛나는 샛별처럼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 2005년 11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 첫 출품한 후 매년 두 차례씩 꼬박 출품했다. 25번 경매에 올라 단 한 번(2007년 11월) 유찰기록을 빼놓고 전 작품이 낙찰행진했다. 2008년 리먼사태가 터지고 경기불황이 미술시장에 옮아붙기 시작한 이후 낙찰가가 40% 이상 떨어질 때 오히려 그의 작품은 추정가를 웃돌며 '한국 미'의 진가를 발휘했다.
한지와 먹, 바늘 같은 세필을 이용해 더욱 치밀하고 섬세하게 변해가고 있는 작가 최영걸을 경기 용인 수지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만났다.
▲ 홍콩 크리스티가 낳은 한국 화가 최영걸은 한국의 사계를 담은 수묵담채로 미술시장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다. |
■2005년 홍콩 크리스티가 쏘아올린 최영걸
"에릭 창(홍콩 크리스티에서 아시아 현대미술 디렉터·수석부사장)이 작업실을 오겠다고 했는데 결국 안 보였어요. 비즈니스로 만나 인간적으로 친해져 두 번이나 오겠다고 했는데 거절했죠. 아시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작업실을 방문하는 사람인데, 중국 작가 작업실 보셨죠. 165m²(50평), 330m²(100평) 운동장 같은 작업실을 돌던 사람이 여기 와서 본다면…. 전에 작업실은 16m²(5평)이었어요. 어휴. 자격지심이라고 하겠지만 창피하더라고요. 하하."
상가주택건물 1층에 자리한 작업실은 물감과 캔버스나 화판이 가득한 '잘 나가는' 작가의 작업실과 달랐다. 반듯하게 줄 맞춘 슬리퍼를 조심스럽게 신고 들어선 작업실 풍경은 서늘했다. 66m²(20평) 남짓한 공간은 커다란 책상과 컴퓨터, 책장이 위쪽에, 이젤에 놓여진 화판, 몇 개의 붓자루가 가지런히 놓인 바퀴 달린 화구통은 아래쪽에 구획되어 보이지 않는 선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바닥엔 머리카락 한 올 없이 깔끔해 작업실보다는 청소용역 사무실 같았다.
붓 터럭 하나 없는 세밀한 작품 앞에선 소름이 돋았다. 그림을 통해서 사람이 비춰진다. 깔끔함에 몸둘 바를 모르자 그는 "여름에 이 작업실로 이사 왔고 도배해서 그런 것"이라며 '허허' 하며 쑥스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촘촘한 그림이나 까칠한 인상과는 달리 그는 터지는 웃음을 삼킬 수 없는 말보따리를 풀었다. '크리스티 작가'인 그는 처음엔 크리스티가 무엇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2005년 이화익갤러리와 일을 하게 됐는데 어느 날 크리스티에 작품을 보낸다면서 1회 개인전 때 팔리지 않은 100호 크기 바다 그림을 가져오라고 하더군요. 크리스티가 뭘까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도 없고, 또 시간도 없어서 못가지고 가겠다고 했더니 차를 보내겠대요. 그렇게 가져간 그림이 2005년 11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추정가 4배를 웃도는 1500만원에 낙찰되는 바람에 어안이 벙벙했어요."
2000년 입시에 회의를 느껴 14년간 일했던 계원외고 실기강사를 그만두고 나와 '작가가 되겠다'고 다짐한 지 5년째. 곰팡이 슨 지하작업실에서 2년간 미친 듯 그림만 그렸던 순간이 지나고, 검증 받고 싶어 간신히 모은 돈으로 개인전을 3번이나 치러도 눈길 하나 주지 않던 미술시장은 난리가 났다. 여기저기 화랑에서 러브콜이 왔고 불난 호떡집마냥 후끈 달아오른 미술시장에서 그의 작품은 매진사례가 이어졌다.
■한국 화가 죽었다? "더 치열하게 파자"
'바늘로 한땀 한땀 떠 가듯이' 그려낸 풍경은 너무나 '착해서', 휙휙휙 속도가 변하는 이 시대에 오히려 영혼이 정화되는 듯한 감동을 준다. '한국 화가 죽었다'는 살풍경한 시대에 그는 성실하게 살아내 '수묵의 맛'을 이어가고 있다.
"처음엔 오용길(화백) 짝퉁같다"는 소리도 들었고, "구태의연한 사실적인 그림이 아니냐"며 2004년 3회 개인전까지 미술평론가들은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오기가 생겼다. 아직까지 한국화 구상, 산수화나 풍경을 현대적으로 도전해서 치열하게 하는 사람이 없고 전통산수화 맥이 끊겨가는 상황은 오히려 기회였다.
"나는 치열하게 파는 것에 지겨워하지 않으니까 남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파고 들자." 동양화에서 쓰지 않는 음영을 쓰고, 사실적인 느낌을 가미했다. 산수화이되 산수화도 아니고 사진속 풍경 같은 한국화. 동서양 짬뽕기법으로 무장했다. 첫 개인전은 잊을 수 없다. 옆구리에 신문뭉치를 끼고 있던 아줌마는 몇번이고 그림을 보더니 자신에게 팔라고 했다. 가진 돈이 이게 전부라며 신문뭉치를 푼 돈은 70만원. 지나가다 본 그림이 너무 맘에 들어 은행에서 돈까지 찾아왔다고 했다. 친지에게 예약되어 있는 그림(120만원)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팔았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첫 판매.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 "나도 할 수 있겠다." 자신감이 생겼다.
"그림 그려서 먹고만 살 수 있다면, 직장인 월급 정도만 받아올 수 있다면 난 그 이상 바랄 게 없다."
고무줄처럼 욕망을 단순화하자 더욱 치열해졌다. 대량 생산시대, 스타 작가로 뜨면서 변하는 작가들을 반면교사로 삼았다. 돈다발을 들고 찾아오는 사람, 주문이 밀려들어도 현혹 당하지 않았다.
"천천히 가더라도 내 작업은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은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붓은 한해 한해 더 작아졌다. 지금은 2004년보다 3분의 1이 준 면상필로 작업한다. 그림은 치밀한 세포줄기처럼 '미친 존재감'이다. 돋보기로 들여다봐도 도톰한 붓질은 생동감이 넘친다.
"나는 남이 손 대고 남는 것을 못 견딘다. 서양화는 밑칠하고 마무리로 올라오면 끝이지만 한국화는 처음에 시작한 게 끝이다."
그의 작업을 두고 가내수공업이라고도 하고 전근대적이라고도 한다. 쉬운 세상, 왜 느리고 더디게 가느냐고 물었다.
그가 중국에서 구한 전시도록이라며 흥분하며 펼쳤다. 낭세녕(1688∼1766)의 그림. 서양인이 중국 재료로 비단에 그린 그림. 동서양 기법이 섞인 묘한 정물화. 그의 작품과 분위기가 닮았다. 그가 다시 펼쳐 보여준 것은 백준도. 중학생 때 아버지가 출장길에 사다준 관광용 두루마리 그림. 이 그림 때문이었다. 동양화를 전공한 것도, 대만미술관에서 만난 7m짜리 그림 앞에서 망연자실하며 몇 시간을 보고 또 보던 그림. 그림자에도 색깔이 있었다. 닮고 싶고 뛰어넘고 싶은 사람은 또 있다. 중국 국보 1호 장택단의 '청명상하도'를 펼치며 그는 활처럼 휜 감정을 드러냈다.
"섬세함, 아직 멀었다. 낭세녕과 장택단 그림 앞에서 나는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그는 "수묵에 색을 입히다가 망쳐 두 달 그린 그림을 찢어버리고 끙끙 앓아눕기도 하고 또다시 그린 그림에 색칠하는 순간 아차 싶어 또 다시 실패해도 종이와 붓이 주는 매력이 대단해 더 고민하고 더더더, 치밀하게 작업해 나갈 것"이라며 "내게 주어진 재능을 그림에 쏟아붓겠다"고 했다.
/hyun@fnnews.com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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