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도 하면서 전원주택을 마련해 틈틈이 농사도 짓고 레포츠도 즐기며 취미 생활로 음악을 할 수 있는 삶. 일반 직장인들이 꿈꾸는 삶이지만 대부분은 현실의 삶에 쫓겨 마음속 동경으로만 남겨두고 있다. 그러나 직접 이런 삶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CEO치고 드물게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김명현(62) 시스템베이스 대표는 10여년 전부터 강원도 영월에 전원주택을 마련해 농사를 짓고 있다. 또 어릴 때부터 취미 생활이었던 기타연주는 수준급이며 피아노, 플루트도 배웠다. 음악에 대한 열정과 욕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근에는 스킨스쿠버도 취미목록에 보태졌다.
특히 올해는 직원들과 조를 나누어 한강의 발원지인 태백에서 한강까지 600㎞를 카약과 트레킹으로 이동하며 회사의 단합을 도모하고 있다.
김 대표는 “원래 혼자 도전해보고 싶었는데 팀장들이 도전과 성취를 직원들과 함께 나누자고 건의해 전체 직원들이 조를 나눠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본업에 소홀한 것도 아니다. 지난 1987년 창업한 시스템베이스는 국내 시리얼통신 분야의 최고 기업으로 자리 잡았다. 시리얼통신은 주로 산업현장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통신 방식으로 최초 컴퓨터 보급이 일반화되기 전부터 사용됐으며 지금도 정밀 제어 장비 또는 일반 저속 통신에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최근 해외로 눈을 돌린 시스템베이스는 2012년 매출 500억원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1969년에 컴퓨터와 만나
김 대표의 어릴 적 꿈은 과학자였다. 호기심이 많은 소년은 이 세계의 근원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물리학과를 선택했다. 그러나 어릴 때 꿈꿔왔던 것과 배우는 것은 완전 달랐다.
김 대표는 “우주 같은 것을 배울 줄 알았는데 수학만 배워 학과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군대가 김 대표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경리단 전자계산 사병으로 군 복무를 한 김 대표는 그곳에서 컴퓨터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국내에는 컴퓨터가 군에 2대, 유한양행에 1대 등 총 5대만이 있었다.
김 대표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물리학보다는 신세계를 구현할 수 있는 컴퓨터 분야에 관심이 쏠렸다”며 “복학 후 부전공을 전자계산과로 옮겼다”고 말했다. 대학을 졸업한 김 대표는 자연스럽게 컴퓨터 관련 회사에 입사했다. 당시 삼성, LG뿐만 아니라 국내 기업 중에는 컴퓨터와 관련해 사업을 하는 곳이 없었다. 김 대표는 컴퓨터를 세계 최초로 만든 유니시스라는 회사에 입사했다.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곳에서 5년동안 시스템엔지니어로 근무했다.
■증권사 시세판 디지털로
김 대표의 제2 직장은 LG전자였다. 1978년부터 LG전자가 컴퓨터 사업에 본격 뛰어들면서 합류했다. 여기서 소프트웨어 과장, 개발부장을 거쳐 시스템 사업부장을 역임했다. 시스템 사업부는 지금의 LG CNS의 모태가 되는 부서였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컴퓨터 등이 대중화되지 않고 IT 인프라가 없어 크게 주목받지 못한 사업부였다.
김 대표는 “개발부장 등을 하다 시스템 사업부장을 하니 고객을 만나고 영업을 하면서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LG전자 시스템 사업부에서 개발한 것 중에는 증권사 시세 게시판이 대표적이다. 그는 “당시 증권사에 가면 직원 한두 명이 큰 칠판 앞에 서서 방송을 듣고 그때 그때 시세를 고쳐 적고 있었다”며 “이것을 브라운관으로 대체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대가 시스템 사업부를 따라오지 못했다. 김 대표는 “회사가 새해 경영전략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TV, 냉장고 사업부 매출의 몇십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 시스템 사업부를 느닷없이 해체시켰다”고 말했다. 개발부장으로 다시 자리를 옮긴 김 대표는 결국 자의 반 타의 반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시리얼 멀티포트 사업 집중
친구 사무실 한편에 직원 3명과 책상 2개를 구비해 사업을 시작했다. 퇴직금 500만원이 종잣돈이었다. 첫 사업은 LG전자 시스템 사업부에서 했던 아이템이었다. 증권사 시세 게시판을 시작으로 공장 자동화의 필수인 공정 진행 게시판, 교회 전광판 등을 주로 다뤘다.
김 대표는 “공장 생산 현황을 전광판에 표시하면 작업자가 속도 조절을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어 공장 자동화의 필수품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판매 대금 회수 등의 문제로 사업을 시작한 지 2년 만인 지난 1989년부터는 시리얼 통신 사업에 전념했다. 김 대표는 “전광판이 아닌 그 안에 들어가는 멀티 시리얼 포트를 생산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멀리 시리얼 포트는 중앙 컴퓨터와 장치 간의 중간 포트 역할을 한다. 당시 내부무(행정안전부)가 주민 전산망 사업을 하면서 시스템 베이스는 4000여개의 시리얼 멀티 포트를 수주했다. 김 대표는 “현재의 구청, 주민센터에 컴퓨터 한 대를 놓고 각 창구에 있는 사람들은 모니터랑 키보드만 놓고 이 컴퓨터를 함께 이용했다”며 “시리얼 멀티 포트는 이를 가능케 하는 장치”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경쟁사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초고속 인터넷이 가능해지면서 김 대표는 해외로 눈을 돌렸다. 5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해외에 진출해 현재 전 세계 30여개국 7000개 이상의 고객 및 파트너를 보유하고 있다.
김 대표는 “대만, 중국 기업들이 말도 안되는 가격으로 시리얼 멀티 포트를 생산하고 있어 시스템 베이스는 그들과 경쟁하는 제품보다는 그들이 만드는 완제품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을 팔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현재 매출 중 국내가 80%, 해외가 20%인데 앞으로 이를 해외 80%, 국내 20%로 바꿀 계획이다. 그는 “직장 생활은 자기 사업을 하기 위한 준비 단계일 뿐이다”라며 “자기 사업을 하겠다는 패기가 있어야 직장 생활도 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pride@fnnews.com이병철기자
■김명현 대표 약력 △62세 △서울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졸업 △한국유니시스(1974년) △LG전자(1978년) △시스템베이스 대표이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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