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

[박현주가 만난 아트人] (40) 근현대 한국화의 영원한 맞수 청전·소정

▲ 청전 이상범 하경산수/지본담채 68×34.5cm

청전(靑田) 이상범(1897-1972)과 소정(小亭) 변관식(1899-1978). 둘은 한국 근현대 전통회화를 대표하는 거목이며 영원한 맞수로 꼽힌다.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적인 미감과 정서를 현대화시키고자 애썼다는 점에선 서로 비슷하지만, 그 작가적 삶이나 표현기법 면에선 많이 달랐다. 청전과 소정의 대표작을 모아 한자리에서 비교해볼 수 있는 특별전 '요산요수(樂山樂水)'가 서울 인사동 공아트스페이스에서 대동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열리고 있다.

요산요수(樂山樂水)는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한다'는 뜻으로, 조선시대 문인들이 자연의 산수화를 그들의 내면을 표출하고 이상을 추구하는 화제(畵題)로 삼았다는 점에 주목한 전시다.

■닮은 듯 서로 다른 청전과 소정

우선 청전 산수의 전형적인 특징은 묵직하고 푸근한 향토미를 자아내는 우리의 산하를 배경으로 삼았다는 특유의 친근감이다. 작품에는 늘 도포 입은 노인들이나 농부의 흥겨운 모습이 등장해 한국인 특유의 여유와 해학이 넘쳐난다. 반면 소정의 작품은 진한 먹을 묻힌 마른 붓질의 반복으로 짙고 거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이 특징이다. 관념 속에 이상화한 산수가 아니라 현실의 산수를 그린 실경산수화를 그려내고자 했다는 점에서 소정과 함께 겸재 정선의 맥을 잇는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특히 변관식은 정선 이후 금강산 그림을 가장 잘 그린 작가로도 손꼽힌다.

작가의 삶은 그림에 고스란히 배어나기 마련이다. 청전과 소정 역시 동시대를 살았지만 서로 다른 삶을 지향했다. 청전이 현실주의 모범생 같은 삶 속에서 안온하고 순응적인 농촌풍경들에 매료됐다면, 기개가 넘치는 강렬한 그림들을 그렸던 소정은 작품을 닮아 구속받길 싫어해 일생 동안 저항적이고 방랑벽이 심했다. 그래서일까. 평생 야인을 자처한 소정의 그림은 부드럽고 평온한 아름다움이 돋보였던 청전의 그림에 가려 생전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 소정 변관식 옥류천/지본담채 51×39.5cm

■한국 산수화의 새로운 전형 창조-청전양식

청전 이상범이 산수화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10대 후반 그림 입문 초기 서화미술회 강습소에서 스승인 심전(心田) 안중식을 만나면서부터다. 그의 호 청전(靑田)도 '청년 심전'이란 뜻이다. 하지만 고전적 규범을 답습했던 안중식과 달리 동서미술의 융합을 통해 기존의 정형화된 산수화법을 현대화시키려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그는 서양화의 원근법이나 음영법을 동양의 전통회화 기법과 과감히 접목해 특유의 조형기법을 완성해냈다.

청전은 30대에 최고의 작가적 명성과 대중적 인기를 누리며 예술가로서 첫 번째 황금기를 맞는다. 1926년부터 10년 가까이 신문사 미술기자로 활동한 시절이다. 신문의 수많은 삽화·컷·기행 스케치 등을 통해 서양화식 조형기법을 체득했으며, 삽화작업에 참여한 연재소설만 40편이 넘을 정도였다. 반면 해방 이후 40·50대는 고난의 시기였다. 신문사 재직시절의 경력으로 인해 친일작가로 몰려 1949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창설시 심사위원에서도 제외되는 아픔을 겪는다. 그러나 1950년대 초 드디어 한국 산수화풍의 새로운 전형이라 평가받는 특유의 '청전양식'을 만들어 작가적 입지를 재확인시킨다. 한편에선 그의 독창적인 작품제작기법을 일명 '대나무 잎 터치기법'이라고도 부른다. 마치 문인화의 사군자에서 빠른 손놀림의 붓 터치로 대나무 이파리를 그리는 것처럼 생동감 넘친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산천초목이나 물결도 그의 붓만 거치면 경쾌하고 명랑한 리듬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그 빠른 속도감과 생동감에 보는 이까지 절로 신나게 한다.

대부분 정겨운 시골풍경인 청전의 작품들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아주 어린 나이에 상경한 자신의 향수에 대한 고백인지도 모른다. 가로로 길게 구성된 평온한 들녘이나 그 길을 따라 소를 몰고 가는 이름 모를 농부, 그 모습은 영락없이 대자연에 순응하고 소박하게 살아가고 싶은 우리 자신을 떠올리게 한다.

청전은 주로 가을과 겨울의 정취를 많이 그렸다. 아마도 두 계절은 나무들과 잡풀을 속필로 처리하는 청전 특유의 준법을 나타내는데 효과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노년인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여름 풍경도 적지 않게 남겼다. 짙은 녹음을 풍부한 농담과 깊은 먹빛으로 담아낸 여름풍경에서 수묵미의 진수를 느끼게 한다. 화면 전경에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이 보이고, 중간에 소를 몰고 가는 농부, 그 뒤로 산성과 누각과 먼 산을 차례로 배치하는 전형적인 3단 구성을 이룬다.

■화단의 못 말리는 외골수-소정 변관식

청전 이상범과 함께 '근대 한국화단의 양대산맥'으로 평가받는 소정 변관식. 하지만 평생 안정적인 삶을 살았던 청전과 달리 생전의 소정은 못 말리는 화단의 외골수이자 야인으로 정평이 났었다. 1956년 국전심사위원으로 참가했던 그는 수상자 선정과정에서 파벌싸움이 끊이지 않자, 점심식사자리에서 냉면 놋대접을 심산 노수현의 얼굴에 집어던져 눈두덩을 찢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급기야 당시 신문에 국전심사의 불공정성을 폭로한 글을 기고한 후 다시는 국전 심사위원을 맡지 않고, 재야 화가로서 야인생활을 고집한다.

겉으론 거칠고 어딘가 미숙해 보이지만 힘이 넘치는 소정의 화풍은 1976년 작고한 이후에야 '가장 한국적인 화풍'이라고 재평가받는다. 소정이 한국적 산수화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23년 화우(畵友)인 이상범, 노수현, 이용우 등과 뜻을 모아 그룹 동연사(同硏社)를 만들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주된 관심사는 오랜 전통처럼 만연하던 중국식 관념산수와 일본화풍을 탈피하자는 것이었다. 여기에 역동적이고 질박한 터치, 파격적인 구도, 해학적인 인물상 등이 어우러진 강한 생명력은 소정의 주된 특징이다. 또한 먹을 엷게 찍어 윤곽을 만들고 그 위에 먹을 중첩되게 올리는 적묵법과 진한 먹을 퉁퉁 튀기듯 찍어서 선을 파괴하는 파선법은 '소정화풍'이라 불린다.

조선 왕조 마지막 화원이었던 조석진(趙錫晉)의 외손자이자 한의사의 아들로 유복하게 자란 소정은 11세에 벌써 서화미술원에 입학해 그림을 시작한다. 그 후 1925년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수묵화풍을 접하기도 하지만, 귀국 후 전국을 돌아다니며 실경을 사생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풍을 찾아내고자 평생을 바쳤다.

단소를 잘 불었던 소정은 '그림에도 장단과 가락이 있어야 한다'며 그림에 음악적 풍류를 담고자 노력했다. 평소 전국의 산야를 방랑하면서도 특히 수차례 다녀온 금강산에 대한 애착이 강해 그를 소재 삼은 명작을 많이 남겼다.

한편, 공아트스페이스 특별전 '요산요수(樂山樂水)'전에는 청전과 소정의 일부 비공개 작품 포함, 총 42점을 선보이고 있다. (02)735-9938.

/hyun@fnnews.com미술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