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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업을 이끄는 사람들] ‘집권 2기’ 맞은 구자흥 명동예술극장장

[문화산업을 이끄는 사람들] ‘집권 2기’ 맞은 구자흥 명동예술극장장
사진=서동일 기자

학교가 끝나면 동대문 헌책방을 일수 찍듯 돌아다녔다. 주로 손이 갔던 책은 인문학 서적이다. 그때 집어든 이태준의 '문장 강화', 시인 정지용의 '백록담'은 지금도 그의 서재에 꽂혀 있다. 1922년 출간된 김소월의 시집도 당시 건졌던 책이건만, 아쉽게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시가로 치면 1000만원이 넘을 거예요. 친구에게 빌려줬는데 누구였는지 모르겠어요."

그해 발표된 시나 소설은 죄다 읽었던 이 고교생은 우연히 들른 서울 남산 드라마센터(현 남산예술센터)에서 연극 한 편을 본 뒤 몇 날 며칠 잠을 설친다. "연극의 언어가 책보다 더 강렬했으니까요." 그때 본 연극이 한국 연극사에서도 손꼽히는 명작 이해랑 연출의 '밤으로의 긴 여로'(1962년)다. 배우 황정순, 장민호, 여운계 등이 출연했다.

"그 연극 보고 평생 연극을 업으로 삼는 이들이 많습니다. 배우 손숙, 연출가 손진책(국립극단 예술감독)도 거기에 속해요." 이렇게 말하며 털털 웃는 이는 구자흥 명동예술극장장(67)이다. 지난 2009년 6월 서울 명동에서 34년 만에 부활한 명동예술극장의 초대 수장이었고 지난해 11월 말 연임되면서 '집권 2기'를 맞은 그는 이제 다시 먼 길 채비에 나서고 있다.

명동예술극장은 일제강점기엔 영화관 명치좌, 해방 후엔 시공관, 국립극장으로 간판을 바꿔 달면서 1960년대 '한국의 연극 메카'로 떠올랐지만, 1970년대 국립극장의 남산 이전과 함께 부지가 매각되는 등 곡절을 겪었다. 그 뒤 극장의 부활을 도모해온 명동 상인들과 연극인의 뜻이 결실을 맺어 2009년에야 재건의 빛을 본 것이다.

서울고 재학시절부터 '연극 키드'로 극장가를 드나들었던 그는 지금까지 연극계와 끈을 놓은 적이 없는 사람이다. 대학(서울대 미학과)에선 연극반 회장을 지냈고, 졸업 후 극단 실험극장에 들어갔다가 "먹고살기 위해" 대기업, 광고회사를 전전했지만 그 와중에도 작품을 기획하고 제작했다.

그의 '명동 집권 1기'에 대한 평가는 후한 편이다. 평균 63%를 기록한 유료객석점유율을 봐도 그렇다. 지난해 올렸던 '우어 파우스트'의 제작비 회수율은 90%에 달했다. 작품마다 평단의 리뷰도 대체로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밀월기간은 끝났다. 앞으로 정말 잘해야 한다"며 고삐를 죄고 있다.

구 극장장이 극장 경영에서 가장 중심에 두고 있는 건 '좋은 작품' '관객 개발' 두 가지다. "작품과 관객은 서로 맞물려 있어요. 물론 좋은 작품에 항상 관객이 구름처럼 몰리는 건 아닙니다. 그 간극을 메워주는 건 또 정성입니다. 정성은 윤활유 같은 거죠. 극장은 그저 굴러가는 게 아니거든요. 다듬고, 가꾸고 해야 합니다."

질 좋은 작품을 꾸준히 무대에 올리기 위해 그가 꺼내든 카드는 중장기 라인업 시스템이다. "2015년까지의 작품 라인업을 오는 5∼6월께 완성할 계획입니다. 극장을 한 해 석 달은 국립극단에 빌려줘야 하고, 한 달은 극장 정비기간이라 작품을 못올립니다. 총 8개월 정도 기간이라 한 해 7편 안팎 제작이 가능해요. 부피가 크지 않아 3개년 라인업이 어렵진 않습니다."

해외 극단의 명작 공연도 내년부터 선보일 계획이다. "명동에서도 해외 최신 트렌드를 즐길 수 있게 해주자는 차원"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관객층은 해외관광객으로 타깃을 넓힌다. "명동엔 외국인이 넘쳐납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 자막공연도 하고 하루 2회 공연도 검토 중입니다."

명동예술극장의 한 해 살림은 정부 지원금 32억원, 자체 수익금 20억원을 합쳐 총 52억원 정도로 꾸려진다. 1편당 제작지원비는 1억7000만∼3억8000만원 정도. 다른 장르와 비교하면 소액 그 자체지만, 대학로 민간 극단과 견주면 이만큼 풍족한 자금을 주는 곳도 없다. 그만큼 연극계가 여전히 척박한 풍토라는 의미도 된다.

"사실 연극계는 어디든 힘들어요. 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예요. 영국 내셔널시어터의 평균 유료 객석점유율은 90%가 넘지만 매표 수입만으로 운영을 못합니다. 재정의 절반이 기업 후원 등으로 이뤄져요. 연극계는 자동화, 전산화로 효율이 높아지는 곳이 아니잖아요. 다른 산업과는 차원이 다른 영역입니다. 재생 반복이 안되는 기초 순수예술입니다. 대신 문화 전체 산업에 토대를 제공해준다는 면에서 잠재적인 경제가치는 엄청나겠지요."

그는 연극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정말 사람답게 사는 게 뭔지 극장에 가면 분명히 배웁니다. 무대 위 사람들의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에너지, 생명력은 다른 곳에선 못 만납니다.
"

복잡한 알력으로 얽혀 있는 국내 연극판에서 그는 적이 없는, 대표적인 호인으로 꼽힌다. 그 비결이 뭐냐고 묻자 그는 "독기가 없었기 때문"이라며 한바탕 웃었다. "그게 없어서 예술가가 못됐어요. 예술가 주변에서만 있었죠. 그래도 나쁘진 않았습니다."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