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미세하게 볼록한 면으로 이루어져 있는 금빛의 입방체(cube). 채은미의 화면은 향수와 같은 고급 화장품의 마개처럼 보이는 이 입방체들이 단단한 패널을 일정하게 뒤덮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체스판의 표면처럼 엇갈린 격자의 사방연속문양으로 배열된 입체들은 두 개의 평행한 레이어를 만들어낸다. 하나는 입방체의 윗면이 만들어내는 밝은 금색의 반사면이고, 다른 하나는 입방체들 사이사이로 보이는 자개로 덮인 패널의 표면이다. 밝은 금색의 윗면은 각 입방체 표면의 부드러운 굴곡으로 인해 화면 전체에 현란하고 밝은 빛의 리드미컬한 흐름을 부여하고 있으며, 입체들의 그림자들 사이로 보이는 패널의 표면에서는 색채와 자개의 미묘한 반사 그리고 그림자가 뒤섞이면서 섬세하면서 복잡한 색점들이 떠오른다. 정면에서 바라보았을 때 이 두 개의 레이어들은 일종의 점묘화 혹은 굵은 입자로 이루어진 직조 문양처럼 보인다. 동시에 전면의 금속성 굴곡면의 반사와 후면의 색점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로 인해 앞뒤가 뒤바뀌어 보이는 착시효과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에 세 번째 레이어가 덧붙여진다. 이 레이어는 관객이 화면을 비스듬히 바라보거나 이동할 경우 입방체들의 옆면에 의해 만들어진다. 다시 말해 모서리가 맞닿아 있는 네 개의 입방체들에 의해 패널 위에 빈 공간이 생길 때, 측면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있는 네 개의 금빛 반사면들이 바닥의 색채와 서로 다른 면들을 반사함으로써 이 세 번째 레이어가 형태를 드러내게 된다. 이 입면들의 레이어는 여러 개의 반사들로 이루어진 피드백의 중첩을 통해 한층 더 짙은 금빛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화면 전체에 형성되는 커다란 시각적 깊이와 몰입의 효과를 제공한다.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처럼 반사는 전체를 포함하며 동시에 부분들로 수렴된다. 조명의 변화나 관객들의 움직임에 의해, 혹은 자개로 덮여있는 패널 위의 이미지나 색채에 따라 이 세 번째 레이어는 관객으로 하여금 명확하게 형용하기 어려운 빛과 그림자, 형태와 반영의 추상적 변주를 경험하게 한다.
이 세 개의 레이어들은 모두 반사하는 표면을 지니고 있다. 첫 번째 레이어가 전면의 불특정한 공간을 반영하고 있다면, 두 번째 레이어는 자개로 덮인 표면 위에 다시 가해진 색채와 이미지들을 통해 빛의 회절(回折)과 투사(投射)를 동시에 일으킨다. 세 번째 레이어는 첫 번째 레이어가 지닌 금빛의 계조와 두 번째 레이어가 지닌 구체적 이미지-색채를 혼합하고 재귀(再歸)시킴으로써 화려하고도 모호한 시각적 용융상태를 만들어낸다. 게다가 세 개의 레이어들이 모두 화려한 금빛의 주조(主調)를 나타내는 까닭에 화면 위에는 커다란 빛의 볼륨이 형성된다. 실제로 보는 것 외에는 이러한 빛의 중첩과 파동을 달리 사진이나 영상으로 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 거울의 표면은 모두 곡면으로 이루어져 있어 일방적이고 사실적인 반사가 아닌 벡터들을 만들어낸다. 때문에 화면은 이 커다란 빛의 흐름을 뿜어내지 않고 안으로 머금는다. 마치 물기가 흡수되거나 발수되지 않고 표면에 응결되어 있는 것처럼, 채은미의 화면 위에서 어지러울 정도로 강렬한 금빛의 입자들은 모두 표면에 응결되어 있다.
채은미의 화면은 빈 공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공허-모듈(emptiness-module) 혹은 셀(cell)이라고 부를 수 있을 이 빈 공간들을 만들기 위해 각각의 입방체들은 폭에 비해 다소 높게 제작되었다. 이 사소한 차이로 인해 화면 위에는 시각적으로 깊은 우물들이 형성된다. 각각의 우물은 볼록한 네 개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벽의 곡면은 아랫면의 이미지 뿐 아니라 측면과 측면에 반사된 대척면의 이미지들까지 고루 투영한다. 두 개의 오목거울을 사용하는 매직-미러(magic-mirror)가 그 사이에 있는 사물을 허공에 떠있는 것처럼 보여주듯, 이 네 개의 볼록거울로 이루어진 우물은 밑면의 이미지와 색채가 빈 공간 속에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착란을 일으킨다. 이러한 시각적 반전은 위와 아래, 볼록면과 오목면, 입체와 빈 공간, 사물의 표면과 그것의 반영 등 다양한 층위에서 일어난다. 심지어 이러한 전위(轉位)는 시각적인 데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대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념이 동요를 일으키는 지점에까지 나타난다. 그것은 단순히 형태 심리학에서 설명하는 '형태-여백'의 이항(二項)이 아닌, '부재(absence)와 그것의 여백'이 상호-지시하는 관계를 보여준다.
부재는 '없음'이나 '떠남' 혹은 '소멸'이 아닌 의미와 주목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사건이다.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은 아무 것도 스스로 재현하지 않고 단지 현재의 시간을 반영할 뿐인 주변의 사물들이다. '떠난' 장소, '소멸이 일어난' 공간들은 무의미하지만 동시에 고립을 일으키는 사물들로 둘러싸여 있다. 빈 공간과 그것을 둘러싼 '반영하는' 존재들은 둘 다 '부재'를 만들어내는데 참여한다. 채은미의 화면을 뒤덮고 있는 각각의 셀들은 그만큼의 거울로 이루어진 입방체들과 상호지시 관계에 놓여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입방체들은 종교적인 감정을 떠올릴 만큼 화려한 금빛의 사물들이다. 일종의 만다라와도 같은 현란함과 아름다움의 파동이 이 입방체들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마찬가지로 채은미의 빈 공간, 공허-모듈 역시 승화(昇華) 혹은 초-물질화(trans-substantiation)의 과정에 있다. 그것들은 의식(儀式)을 위한 것이며, 이전까지 부재를 일으키던 모든 대상들을 대체하고 있다. 마치 종교적 의식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처럼 이 빈 공간들은 절대적인 어떤 관념들을 실체로 바꾸어 놓았다. 그것들은 고립과 반영의 조건들을 재현한다. 그것들은 반복할 뿐 아니라 무한히 동일한 장소들을 만들어낸다.
모든 부재의 공간들이 반복한다 하더라도, 수없이 많은 소멸의 장소들이 버섯처럼 동일한 형태로 자라난다 하더라도, 각각의 빈 공간들은 어쩔 수 없이 각각 다른 순간들로 기록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것들이 한데 모여 전체를 이룰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각각의 셀들은 독립된 사건들을 함축하고 있다. 이 사건들은 가장 밑에 깔려있는 그림 혹은 색채들의 문양으로부터 비롯된다. 화면에서 각 셀의 바닥은 자개의 문양으로 이루어져 있어 서로 미세한 차이를 나타낸다. 결국 매직-미러의 가상적 공간으로 떠오르는 것은 이 바닥의 문양이다. '카페트의 형상'은 바로 바닥에서 가장 위의 표면으로 떠오른 자개 표면의 이미지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돌출된 입방체의 역할은 바로 맨 밑바닥에 그려진 이미지를 위로 떠올리는 것이다. 그것들은 사방이 벽으로 막혀 빛이 갇혀있는 우물들이지만 전체로 보았을 때는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카페트의 형상'(Figure in the Carpet)을 이루어내는 그물코들이다. 고립되어 있지만 상호 소통하는 빈 공간들이 궁극적으로 만들어내는 전체의 상(像)을 작가는 '금빛 실루엣'이라고 부른다. '실루엣'은 윤곽선이나 문양의 형태를 가리키거나, 혹은 금빛의 산란에 가려진 배경의 이미지를 가리킬 것이다. 꽃이나 자기, 혹은 오방색의 전통적 문양이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하나의 색채가 푸른 하늘이나 노을처럼 나타나기도 한다. 채은미의 '금빛 실루엣(Gold Light Silhouette)'은 삶에서 발견되는 일상적인 형태들이 금빛의 물질적/비-물질적 구조를 통해 추상화되는 과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금속성의 입방체들이 부드러운 회화적 모티프들을 끌어올리는 과정을 바라보는 것은 전체와 디테일의 무한한 변주 속으로 빠져드는 것과 같다.
가장 최근의 작업인 '각도의 변화'는 이제까지 일관해 온 입방체들의 수직-배열을 사선으로 바꾼 것이다. '각도의 변화'가 몰고오는 변화는 이제까지의 단일한 화면을 여러 개의 면들로 분할하게 되는 것이다. 분할된 면들은 45도로 기울어져 전체 화면에 입체감을 부여하는데 활용된다. 전체 화면이 나타내는 것은 커다란 입방체 혹은 윗면이 없는 빈 공간의 모습이다. 때로 이 빈 공간의 아랫면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분리된 것으로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일종의 반복적 수사라고나 할까, 전체의 형식은 부분의 형태를 동일하게 재현하고 있다. 다른 측면에서 살펴보자면, 채은미의 작품은 화면을 기울어진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 실제로 작품의 시각적 효과를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관객의 입장에서는 정면에서 캔버스를 감상하듯 바라보는 대신 측면으로 이동하면서 화면을 운동감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각도의 변화'는 제목이 구체적으로 적시하는 것처럼, 이 작품을 바라보는 가장 최적화된 시점을 유도하는 작품이다. 즉 입방체의 배열과 화면 전체의 형태 모두에 시선의 운동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셀의 깊이를 강조하고 입방체 표면의 반사를 더욱 극적인 것으로 증폭시킨다.
채은미의 화면은 반복과 확산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모듈로 이루어져 있어 언제든지 어느 공간으로든지 전체로 이어질 수 있다. 반사와 깊이의 굴곡들로 이루어진 금빛찬란한 세계란, 철학적인 동시에 종교적인 절정의 장면들을 떠올린다. 이 장면들 속에서 모든 개체들은 반영들로 가득찬 텅 빈 내면과 단단하고 반사하는 외면을 갖는다. 이들이 서로 소통하며 만들어내는 커다란 이미지는 다시 일상이나 자연의 소소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세계는 전체에서 부분으로, 부분에서 전체로 매번 다시 순환한다.
채은미의 화면이 만들어내는 법열의 순간이다. 심지어 화면 속에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더라도, 단지 단순한 푸른 색 혹은 붉은 색의 환영들 만으로라도 이 영속적인 순환은 그것을 바라보는 이를 풍경의 일부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금빛의 입방체 혹은 그것으로 가득 찬 빈 공간이 되는 것이다.
airyoo@naver.com 유진상 계원예술대 교수
/파이낸셜뉴스 fncast 채진근, 박동신P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