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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 ‘7번방’의 사형수/이주흥 법무법인 화우 대표변호사

[여의나루] ‘7번방’의 사형수/이주흥 법무법인 화우 대표변호사

보통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피고인석에 앉는 것이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남의 일인 양 여긴다. 그러나 일이 꼬이다 보면 예기치 않은 묘한 상황에 빠지면서 누구나 범행의 용의선상에 오를 수 있다. 나는 몇 해 전 일본 규슈의 튤립 축제로 유명한 하우스텐보스 리조트 매점에서 말이 통하지 않아 맥주 값을 내지 않고 맥주병을 따 달라고 하는 수상한 사람으로 몰린 적이 있었다. 가까스로 영수증을 찾아 내 곤욕을 수습했다. 이 경험을 통해 혹시라도 우리 형사사법이 유죄의 입증 책임을 국가에 지우고 있는데도, 현실은 거꾸로 죄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결백함을 밝혀 내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아닌지 잠시나마 이국 땅에서 고립무원의 궁지에 빠져 있을 피고인의 절망감과 막막함을 헤아려 보았다.

누적 관객 수 1300만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영화 '7번방의 선물'에서는 주인공이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어떻게 이런 재판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다. 미국에서는 살인 유죄를 받은 무기수나 사형수의 무죄 논란이 꾸준히 사회적 핫 이슈가 되고 있다. 올해 2월 25일 뉴스위크지의 토니 도쿠필 기자가 쓴 '정의를 다시 생각한다'라는 기사에는 미국 복역수의 약 5%, 사형수의 최소 2%가 무죄로 추산된다고 한다. 미국의 잘못된 형사재판을 DNA 검사로 밝혀내려는 단체 '이노슨스 프로젝트(innocence project)'의 지난해 말 보도자료에 따르면 2012년에 22건의 DNA 감정을 통한 오심 구제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1972년 파출소장 딸을 성폭행하고 목을 졸라 살해한 혐의로 기소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피고인이 옥살이 15년을 하고 39년 만에 살인 누명을 벗었다. 무엇으로 이 복역수의 잃어버린 시간을 대체할 수 있을까.

'7번방'의 사형수처럼 거짓 자백도 의외로 많이 일어난다. "법정에서 다투면 딸에게 위해를 가하겠다"는 '7번방' 피고인에 대한 경찰의 협박이, 1974년 런던 연쇄폭발사건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위해(危害) 형태로 나타난다. 살인사건 등 강력사건의 경우 수사기관은 해결에 대한 압박감으로 무리한 자백 유도의 유혹을 받게 된다. 조서를 재판의 증거로 삼는 우리 형사사법 구조도 자백 수사를 부추긴다. 증거의 군데군데에는 합리적 의혹과 애매함이 깔려 있는데도 검사는 법원 판단 한 번 받아보자는 심정으로 법원에 사건을 떠넘기고 판사는 증거의 허점을 외면한 채 자신의 경험과 정의감을 앞세워 검찰에 쉽게 동조해 버리는 예가 없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목격자의 위증도 오판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1983년 미국에서는 성폭행 피해자가 용의자를 직접 확인하는 특수 유리창 앞에 18세 흑인이 나타나자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으로 이 흑인의 삶은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27년 옥살이 끝에 결국 DNA 검사로 무죄가 밝혀졌지만 산산조각이 나버린 이 흑인의 청춘은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겠는가

퍼즐 맞추기식 역사적 진실의 추적이란 미로의 수수께끼를 푸는 것처럼 어렵다. 정보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현대인에게는 각자의 구미에 따라 정보를 맞춘 것이 각자가 파악한 진실이다.
관찰하는 주체, 자신이 처해진 상황에 따라 사실을 보는 방향이나 방법, 설명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는 일본 영화 '라쇼몽'의 이해관계인들 증언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판사 잘 만나는 것이 재판받는 사람의 큰 복이라는 말이 자조적으로 심심찮게 들린다. 재판관이 당당, 의연하고 냉정함을 잃지 않으면서 현명하면 얼마나 좋을까. 유죄 추정이 아닌 무죄 추정이 헌법 규정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재판 현실에서 살아 있기를 간절히 바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