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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人] 톨스토이 ‘부활’ 무대에 올리는 연출가 고선웅

[문화人] 톨스토이 ‘부활’ 무대에 올리는 연출가 고선웅
사진=박범준 기자


대학(중앙대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가기 전 연극 한 편 본 적이 없다. 그 대신 영화는 텔레비전을 통해 목숨 걸고 봤다.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나고 경기도 가평 등에서 살았고 고등학교는 광주에서 다녔다. 그의 주변엔 연극을 본다거나 영화관을 다닌 이는 사실상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득달같이 달려간 곳은 그 학교에서 가장 큰 연극 동아리였다. 그는 거기서 배우도 하고 극작·연출도 했다. '내 업이 이 길이겠구나' 그는 확신했다.

졸업 무렵, 한 광고회사로부터 5분짜리 연극을 만들면 100만원을 준다는 제의를 덥석 물었다. 당시 그는 124만원 주고 산 컴퓨터 카드빚이 있던 상태였다. "러시아 배우들을 데리고 드라큘라 관 속에 들어가는 장면을 연출하면 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곳이 제 첫 직장이 돼버렸습니다."

서울 여의도 63빌딩에 있던 회사 맨 안쪽 구석 책상에서 그는 매일 기획서 쓰는 일을 했다. 4∼5년 그런 종류의 일을 하다 사표를 쓴다. 빠듯한 형편에 집은 옥탑방으로 옮기고 잠자는 시간 빼곤 대본을 썼다. "1년8개월간 한 달에 한 편꼴로 썼어요. 그때 썼던 작품이 두고두고 밑천이 되고 있어요." 앞날이 보이지 않는 날들의 연속이었지만 그 시절만 생각하면 "아름다웠다" 이 말밖에 안 나온다. 그는 1999년 신춘문예를 통해 희곡작가로 등단했다.

아무런 끈도 없는 신출내기 연출 지망생은 무대를 잡기 위해 자신의 대본을 팔았다. 연출가 데뷔는 1999년 초연된 '락희맨쑈'를 통해서 했다. 그 후 연극판에서 슬슬 존재감을 알렸고 오랜 꿈이 실현된 건 2005년이다. 그해 그는 자신의 극단 '극공작소 마방진'의 닻을 올렸다. 극단 사업자신고를 하던 날, 서울 종로세무소 앞에서 대추나무 도장을 팠다. 그 가게에서 가장 비싼 도장 가격이 7만원. 그는 주인에게 "8만원 드릴 테니 최고로 잘 파달라"는 주문했다. 그 주인은 45분 동안 쉬지 않고 도장을 팠다. 그 도장의 힘이었을까.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재구성한 '칼로맥베스'(2010년), 1980년 광주 이야기를 다룬 '푸르른 날에'(2011년), '리어왕'을 오락비극으로 재창조한 '리어외전'(2012년) 등으로 그는 한국 연극계 하나의 브랜드가 됐다. 작가이자 연출가인 고선웅(47·경기도립극단 예술감독)의 연극 인생은 이렇게 요약된다.

이달엔 그의 작품 두 개가 동시에 극장을 점령한다. 지난 3일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시작한 '푸르른 날에'는 초연 후 해마다 올리는 공연이지만 여전히 관객들이 바글댄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의 만년 걸작 '부활'은 오는 18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개막한다. 예술의전당 개관 25주년 기념 페스티벌 기획물로 그는 톨스토이 원작을 직접 각색까지 했다. 막바지 연습이 한창이던 지난 10일 오전 그를 만났다.

"작전은 다 짰어요. 이제 실행만 남았습니다." 비장한 소감을 밝혔지만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게 톨스토이의 힘"이라고 곧바로 받아친 그는 "죄의식을 그대로 두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진 이야기 자체가 사람을 겸손하고 평화롭게 한다"고 했다. 원작은 자신의 잘못으로 비극적 생을 시작한 카튜사와 이 여인을 구하기 위해 힘든 여정을 펼치는 귀족 청년 네흘류도프의 이야기다. 그는 이 작품을 잡으며 줄곧 견지한 게 "소설의 감동을 해치지 말자. 내 욕심을 위해 소재를 비틀지 말자"였다.

궁극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다. "요즘 우리는 도덕성 부재 시대에 살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자신의 욕망, 죄의식에 대체로 관대해요. 작품 속 주인공이나 작가는 지치지 않고 반성과 성찰을 했습니다. 조금의 타협도 없었어요. 그럼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찾습니다. 그 울림이 이 연극에서도 전해지길 바랍니다."

무대는 올해 재개관한 CJ토월극장의 공간을 제대로 활용한다. 네 대의 리프트, 30m에 이르는 무대 깊이, 성능 좋은 턴테이블의 효과를 최대한 살린다. 무대 색깔은 블랙이다. 이 검고 텅 빈 무대 턴테이블엔 7m 높이의 언덕이 세워진다. 인물들은 이곳을 오르고 내리고 다시 굴러떨어진다. 인생의 그늘, 고난 그리고 부활을 상징하는 장치다. "기록화를 보는 듯한 느낌일 거예요. 성스러운 분위기가 날 겁니다. 무대엔 아무것도 없어요. 형광등 불빛으로 빛과 어둠의 극명한 대비만 있습니다."

사실주의 작품은 조용히 스며드는 게 보통이지만 이 연극은 끊임없이 요란할 것이라고 했다. 안무가 박호빈이 만든 춤으로 무대는 넘실대고 노래·마임·미장센으로 역동성을 발휘한다. '고선웅 식' 재미는 여전히 응축돼 있긴 하겠지만 이전 작품에서 보여준 시끌벅적한 유머는 아닐 것 같다. "감동에 더 비중을 뒀다. 100년 전 대문호의 간절한 메시지가 다치지 않게 조심조심한다"는 게 그의 말이다.
부활은 어느 순간 예고 없이 들이닥친다. "굼벵이가 갑자기 날개 달고 날아오르듯, 연극 속 부활도 그렇게 놀랍게 펼쳐질 겁니다." 카튜사는 배우 예지원, 네흘류도프는 서범석이 맡는다.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