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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 100선] (5) 진주성

[한국관광 100선] (5) 진주성
진주 남강을 끼고 축성된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의 현장이다. 절벽 위에 우뚝 서있는 건물이 국내 3대 누각의 하나로 손꼽히는 촉석루다. 그 아래 논개가 적장을 품에 안고 강물로 뛰어들었다는 의암이 있다.


【 진주(경남)=송동근 기자】 "삼천리 방방곡곡 아니 간 곳 없다마는 비봉산(飛鳳山) 품에 안겨 남강이 꿈을 꾸는 내 고향 진주만은 못해라."

경남 진주 출신 가수 남인수(1918~1962)는 손석우가 작곡하고 반야월이 작사한 대중가요 '내 고향 진주'에서 진주가 가진 천혜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했다. 또 고려시대 문인 이인로(1152~1220)는 우리나라 최초의 시화집으로 손꼽히는 '파한집'에서 "진주의 산수(山水)가 영남 제일"이라며 그 아름다움을 찬탄했다. 이런 진주를 대표하는 명승지로는 단연 진주성이 꼽힌다. 유유히 흐르는 진주 남강을 따라 낮은 성곽을 두르고 있는 진주성에는 우리나라 3대 누각의 하나인 촉석루를 비롯해 창렬사·의기사·북장대·영남포정사 등이 있고, 성 밖 남강에는 의기(義妓) 논개가 왜장을 끌어안고 투신했다는 의암이 있다. 이끼 낀 성돌만큼이나 오랜 세월의 이야기를 간직한 그곳, 천년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진주성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진주성, 천년의 시간을 바라보다

진주시 남강로(본성동·남성동 일대) 남강변 절벽 위에 우뚝 솟은 진주성은 임진왜란 3대 승첩지 중 한 곳으로 10만명이 넘는 왜군과의 전투에서 민관군 7만명이 목숨을 잃은 호국성지다. 이때 의기 논개가 분연히 적장을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그 한을 되갚은 충정의 장소이기도 하다. 그래서 진주성을 느린 걸음으로 한 바퀴 돌아보는 건 마치 진주의 심장을 더듬는 것과도 같다. 진주의 맥박과 숨결이 거기로부터 느껴지기 때문이다.

진주성의 전체 면적은 17만6804㎡(약 5만3500평)에 달하고 돌로 쌓은 석성의 둘레는 1760m로 2㎞가 조금 못 된다. 높이는 5~8m.

지난 28일 빗속에 찾아간 진주성은 먼 옛날 왜군과의 치열했던 격전과 아픔은 뒤로 한 채 그저 평화롭기만 했다. 오랜 세월 계절 따라 꽃이 피고 단풍이 지고 눈이 쌓이는 동안 진주성은 어느 새 시민들이 지친 마음을 풀어놓고 역사와 문화적 향취를 즐기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진주성은 삼국시대에는 거열성, 통일신라시대에는 만홍산성, 고려시대에는 촉석성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 이후로는 진주성, 또는 진양성이라 불렸다. 고려 말 바다에서 올라오는 도둑떼의 침범에 대비해 지은 토성으로 1379년(고려 우왕 5년) 진주 목사 김중광에 의해 석성으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그후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10월 진주 목사 김시민은 이곳에서 불과 3800명의 적은 군사로 2만 왜적을 크게 물리치고 진주대첩 승전고를 울렸다. 그러나 이듬해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7만의 민관군이 10만 왜군에 맞써 싸우다 대패하고 말았다.

현재 사적 제118호로 지정된 진주성에는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성 안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후 순차적으로 이뤄진 진주성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790여채 민가가 철거되고 성 안 서쪽으로 지금의 국립진주박물관이 들어서게 된 것.

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살펴보면 촉석루가 가장 가까운 촉석문과 성의 정문격인 공북문, 호국사로 바로 이어지는 북쪽으로 출입문이 나있다. 성 안쪽에는 진주를 지킨 인물들을 기리는 의기사를 비롯해 쌍충각, 촉성정충단비, 김시민 장군 전공비, 진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선열들의 넋을 기리는 임진대첩계사순의단 등이 자리해 있다.

1925년까지는 경남도청이 진주성 안에 있었으며 성내의 영남포정사는 도청이 부산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도청의 정문으로 사용되던 문이다. 내성 북쪽 끝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북장대는 성 안팎은 물론 성 바깥에 진을 친 병사들까지 지휘했던 건물로 이후 많은 성의 축성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남강의 서쪽 절벽 위에 장엄하게 서있는 서장대 역시 장군이 서쪽의 병사들을 호령하며 지휘하던 곳이다. 진양호 쪽에서 성쪽으로 들어오다가 이 장대를 바라보면 마치 당시 진주를 엄호하던 한 장수의 눈빛이 살아 전해지는 듯하다. 특히 가을이면 절벽 위 장대 지붕의 목조 기와가 단풍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영남 최고의 누각 촉석루와 의암

논개의 낙화(落花)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것은 촉석루였다. 미국의 뉴스 전문채널 CNN이 '한국 방문 시 꼭 가봐야 할 곳 50선'에 선정한 촉석루는 평양의 부벽루, 밀양의 영남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로 손꼽힌다. 남강변 벼랑 위에 우아하고 위엄있게 우뚝 솟아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다. 아마도 남강과 의암, 진주성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천하의 절경을 연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진주 8경 중 제1경을 자랑하는 촉석루는 벼랑 위에 높이 솟아있다 하여 이름 붙여진 것. 이곳은 전란 시에는 지휘본부로, 평시에는 과거를 치르는 시험장으로 활용되던 누각이다.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되자 왜군들은 촉석루에서 진주성을 손에 넣은 것을 기념하는 연회를 성대하게 열었다. 아깝게 스러져간 7만명의 목숨을 슬퍼하며 분루를 삼킨 논개는 이날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홀연히 몸을 던져 충정을 다했다. 이를 지켜본 촉석루는 유유히 흐르는 남강을 바라보며 다시 한번 크게 애통해했을 것이다. 그래서 논개는 진주의 또 하나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촉석루 아래에는 논개가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밟고 섰던 의암으로 내려가는 길이 나있다. 이곳에 서면 당시 논개가 분루를 삼키며 나라의 한을 스란치마로 쓸고 지나갔을 애국충정이 느껴지는 듯하다.


촉석루는 1241년(고려 고종 28년) 세워진 이후 8차례의 중건과 보수를 거쳐 보존되다가 6·25전쟁 때 급기야 불에 타고 말았다. 지금의 모습은 1960년 진주 고적보존회가 다시 세운 것.

매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1시간 동안 이곳에서는 진주시 무형문화재인 진주검무, 한량무, 진주포구락무 등 토요상설 공연이 펼쳐진다. 진주성의 빼어난 절경과 전통문화의 어울림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이 공연은 관광객들에게 많은 볼거리와 감동을 선사한다.

dksong@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