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려졌다시피 제주도 출신의 재일동포 2세 작곡가 양방언(53·사진)은 아버지의 북한 국적 때문에 나이 서른여덟이 될 때까지 한국땅을 밟지 못했다. 의사직을 포기하고 음악활동을 시작하던 20대, 중화권·미국 등지에서 활동이 잦았다. 당시 한반도 상공을 가르는 비행기 안에서 만난 발 아래 저 밑 땅은 그에게 머나먼 나라, 상상 속의 그곳이었다. 하지만 가보고 싶다는 간절함이 아버지의 죽음 후 그의 국적을 대한민국으로 바꾸게 했고, 결국 1998년 비로소 그는 이 땅에 발을 디디게 됐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때 처음 그가 국악의 맛을 알게 됐다는 사실이다. 의사·약사가 넘쳐나는 성공한 재일동포 집안에서 성장한 그에게 음악은 공기 같은 것이었다. 클래식·록·재즈·팝·월드음악 장르를 가리지 않고 듣고 즐겼던 그는 음악은 취미여야 한다는 아버지에 대항해 가출까지 감행할 정도로 음악에 인생을 다 건 사람이었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뒤 뉴에이지, 크로스오버 장르에서 그만의 색깔을 펼쳤지만 정작 국악과는 진지한 만남이 한국을 오기 전까진 없었다.
"지리를 잘 몰라 하루짜리 관광상품을 골랐어요. 덕수궁 근처 음식점을 갔는데 그곳에서 사물놀이 공연을 처음 봤습니다. 그때의 충격이 지금도 얼얼해요. 아랍·중동·아일랜드 음악에 매료된 적이 있지만 우리 음악에 그 이상이 있다는 걸 확신했으니까요."
국내에서 그의 음악활동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공식음악 '프런티어'와 아버지의 고향 제주를 기리며 만든 '프린스 오브 제주'의 선율은 매혹적인 국악의 맛을 전해준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천년학', 국립창극단의 창극 '서편제'에 이어 창작뮤지컬 '몽유도원도'의 음악도 작업 중이다. 왕성한 활동 중에 국립극장 음악축제 '여기 우리 음악이 있다' 페스티벌 예술감독을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맡았다. 지난 3일 시작한 '여우락'은 오는 27일까지 매주 새로운 주제를 던지며 펼쳐질 예정이다.
지난 4일 서울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많은 사람이 우리 음악을 즐길 수 있게 하는 게 목표다. 평소 만나기 어려웠던 전통 음악의 대가들, 뮤지션들을 한꺼번에 만나는 게 보통 즐거움이겠느냐"며 강한 의욕을 보였다. '여우락'은 피아니스트 임동창과 호주의 유명 드러머 사이먼 바커가 꾸미는 '신이 있는 풍경', 월드뮤직 그룹 공명과 그림의 컬래버레이션 무대 '바다숲', 김수철의 6년 만의 단독콘서트 '거장의 재발견' 등을 거쳐 원일이 지휘하는 국립국악관현악단과 한영애, 양방언의 '조율'을 끝으로 대장정이 끝난다.
그는 국악기는 다뤄본 적도 없고, 다룰 줄도 모르지만 자신 안에 내재된 한국적 감성으로 곡을 쓰고 즐긴다고도 했다. 그는 "소리, 선율 하나만으로 모든 걸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 국악의 매력"이라며 "서양음악은 화음, 리듬 모두가 체계화돼있고 복잡한 구조를 이루고 있지만 국악은 다르다. 비브라토, 음정의 움직임, 미묘한 감정 모두를 하나에 담아낼 수 있는 깊이가 있다"고 했다.
예술적 영감을 놓치지 않기 위해 마음의 상태가 부드럽게 열릴 수 있도록 몸을 다스린다. 그의 생활 주 근거지이자 창작의 공간은 일본 도쿄에서 신칸센으로 1시간 거리인 나가노현 가리우자와다. 외국인 부호들의 고급별장이 밀집된 이 지역은 해발 1000m에 세워진 휴양지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별장 숲을 달리며 상념을 정리한다.
"창작의 영감이 마구 쏟아지는 때가 바로 그 순간입니다."
연말엔 피아노 솔로 베스트 25곡을 묶어 첫 악보집을 낼 예정이다. 이 음악들로 단독 피아노 콘서트(12월 23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도 올린다.
jins@fnnews.com 최진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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