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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 100선] (10) 철원DMZ

[한국관광 100선] (10) 철원DMZ
DMZ를 품고 있는 강원도 철원은 '안보관광 1번지'로 통한다. DMZ 우리 측 초소에서 바라본 북녘의 풍광이 한 폭의 그림 같다.


【 철원(강원)=송동근 기자】 두루미, 재두루미, 기러기 등 겨울 철새의 낙원인 강원도 철원은 한탄강, 명성산, 금학산 등 천혜의 절경과 함께 6.25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격전지로 꼽힌다. 특히 20세기가 남기고 간 냉전 유적지 DMZ는 민족 분단의 생생한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는 우리나라 대표적 안보관광지이기도 하다. '한국관광 100선'이 이번 주 찾아간 곳은 최근 'DMZ 세계평화공원' 조성사업 등으로 새삼 관심을 끌고 있는 강원도 철원 DMZ다.

■155마일 DMZ와 태봉국 도성

휴전선 155마일(249㎞) 중 70㎞를 지나는 철원은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의 한가운데에 위치해 있다. 예로부터 이곳은 정치.군사적 요충지로 특히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는 철원 북방 풍천원 벌판에 커다란 궁궐을 짓고 태봉국의 수도로 삼았다. 평강고원과 철원평야로 펼쳐지는 드넓은 들판은 당시 대동방국의 웅지를 품기에 충분한 터전이었으리라. 지금도 철원 북방 평화전망대 앞 DMZ 안에는 둘레 12㎞에 달하는 정사각형 모양의 태봉국 도성이 옛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그 태봉국 도성을 지금의 휴전선이 정확히 반으로 자르고 있어 분단의 아픔이 더해진다. 무엇보다 철원은 6·25전쟁 당시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백마고지를 비롯한 김일성고지, 오성산, 저격능선이 지금은 모두 DMZ 안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하기만 하다.

철원군내에는 가는 곳마다 전쟁의 흔적들로 가득하고 만나는 주민 역시 전쟁의 아픈 상처를 안고 살고 있다. 하지만 DMZ는 현재 겨울 철새들의 낙원으로 자리를 잡으며 역사·문화·생태·관광 측면에서 대한민국 DMZ 중 가장 보존 및 활용 가치가 높아 희망을 안겨주고 있다.

[한국관광 100선] (10) 철원DMZ
월정역


■안보관광의 하이라이트 '제2땅굴'

북한의 남침용 제2땅굴은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에서 발견된 땅굴로 지난 1973년 철책선 근처에서 경계근무를 서던 초병 두 명이 우연히 땅속에서 울리는 폭음을 듣고 발견하게 됐다. 당시 소리가 났던 그 자리에 시추 장비를 이용해 끈질긴 굴착 작업을 벌인 끝에 45개의 시추공 중 7개의 시추공관이 정확히 땅굴 내부로 관통되면서 1975년 3월 한국군 지역에서 두 번째로 북한의 기습 남침용 지하 땅굴을 발견하게 된 것.

이 땅굴은 견고한 화강암층으로 지하 50~160m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땅굴의 총길이는 3.5㎞에 달한다. 그중 일부는 군사분계선 남쪽으로 1.1㎞까지 파내려와 있고 그 규모는 높이 2m의 아치형 터널로 중무장한 병력과 야포 등 대규모 침투가 가능하도록 특수 설계됐다.

■민족분단의 현실 '철원평화전망대'

철원평화전망대는 지난 2007년 10월 개관한 곳으로 2층 전망대에 오르면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비롯한 평강고원, 북한 선전마을까지 내다볼 수 있다. 초정밀 망원경시설과 최첨단 기술로 제작된 지형 축소판 등이 설치돼 민족분단의 현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편안하고 안전한 최신형 관광객 수송 모노레일을 민자로 유치해 관광객들에게 관람 편의도 제공하고 있다.

전망대에 이어 경원선의 간이역이던 월정역에도 들러보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은 남방한계선에 최근접한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보관광의 대표적 경유지로 꼽힌다. 현재는 객차 잔해 일부분만 남아 있지만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강렬한 메시지의 푯말과 함께 분단된 민족의 한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본래 경원선은 한일합방 이후 일제가 주민들을 강제 동원해 1914년 8월 서울~원산 221.4㎞를 연결한 산업철도다. 아울러 철원에서 생산되던 농산물과 북한의 원산 해산물 등을 수송하는 간선 철도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지금의 월정역사는 철원 안보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1988년 복원됐다.

■전쟁의 아픔 간직한 옛 노동당사

철원은 6·25전쟁 이전에는 북한 땅이었으나 휴전 후 남한으로 편입된 '수복지구'다. 남한과 북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공존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노동당사 건물은 지난 1945년 8·15 광복 후 북한이 공산 정권 강화와 주민 통제를 목적으로 건립한 것. 6·25 전쟁 전까지 사용한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 악명을 떨치던 곳으로 유명하다. 북한은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이란 구실로 마을당 쌀 200가마씩을 착취했으며 인력과 장비를 강제 동원했다고 한다. 특히 건물의 내부 작업에는 비밀유지를 위해 공산당원 이외에는 동원하지 않았다. 시멘트와 벽돌로 지은 3층 당사는 6·25 전란에 여타 건물들은 모두 파괴되었음에도 유독 이 건물만 남아 있어 얼마나 견고하게 지어졌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공산치하 5년 동안 북한은 이곳에서 철원, 김화, 평강, 포천 일대를 관장하면서 양민 수탈과 고문, 학살 등의 만행을 수없이 자행했다. 이런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노동당사는 지난 2002년 5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22호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다.

■격전의 현장 '백마고지'

6·25전쟁 당시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찾고자 처참한 고지 쟁탈전이 전개됐던 백마고지전투는 국군 제9사단과 중공군 제38군이 철원 서북방 395고지를 빼앗기 위해 벌인 전투였다. 철원 북방에 있는 395고지는 남동쪽으로 펼쳐진 철원평야 일대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위치여서 이 고지만 차지하면 철원 일대를 전부 위협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특히 395고지는 서울로 통하는 국군의 주요 보급로이기도 했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0일 동안 벌어진 백마고지 전투는 고지 주인이 24번이나 바뀌었을 정도로 치열했으며 이 과정에서 중공군 1만4389명, 국군 3146명이 희생됐다.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철의 삼각지대의 좌변 일각인 철원 지역을 계속 장악하게 돼 국군의 사기 진작에 큰 도움을 줬다고 한다. 철원 백마고지를 찾은 한국인은 누구라도 당시 조국을 위해 아까운 청춘을 나라에 바친 국군 장병들의 숭고한 애국정신에 잠시 멈춰 고개를 숙이고 지나간다.

dksong@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