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은 정보기술(IT)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미(개인투자자)들은 안방에 앉아서 모니터를 통해 정보를 얻고 거래를 한다. 돈의 힘으로 움직이는 기관이나 외국인들은 자동화된 프로그램을 통해 막대한 차익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한맥투자증권 사태처럼 자동화는 한 기업을 파멸로 몰고 간다. 트위터 계정 해킹에 따른 컴퓨터 프로그램 매매로 순식간에 시가총액 1360억달러(152조여원)가 공중에 사라진 뉴욕증시처럼 파장도 크다. 순간의 실수가 한국자본시장을 '플래시 크래시(flash crash·갑작스러운 붕괴)' 사태를 만들 수 있다. 자동화매매 시스템의 현주소를 짚어보며 '소도 잃고 외양간도 태우는' 우를 범하지 않길 기대해 본다. <편집자주>
#. 지난 1999년 선보인 영화 'Gamble(도박)'. 1995년 영국 왕실 자금을 관리하던 233년 전통의 베어링스 은행을 파산시킨 닉 리슨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실존 인물 닉은 가명계좌를 사용해 회사 감사팀의 감시를 피하고, 겁 없는 투자를 일삼았다. 닉은 파산 직전 닛케이지수 선물 투자에 큰 베팅을 했지만 95년 1월 17일 일본의 효고현 대지진으로 폭락을 경험 . 결국 베어링스 은행을 파산시켰다.
인간의 욕망과 탐욕이 지배하는 투자는 곧 파멸이라는 것을 보여준 영화다. 지난 12일 '네 마녀의 날(선물·옵션 동시 만기일)' 단 한 번의 주문 실수로 사실상 파산에 이른 한맥투자증권도 인간의 욕심이 부른 결과라고 증권가에서 말한다. 단 한 푼의 수익이라도 더 얻기 위해 만든 자동화의 예고된 재앙이었다는 평가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인력을 감축하고, 컴퓨터에 의한 자동매매 프로그램에 맡긴 결과라는 것.
■자동화매매의 예고된 인재
지난 12일 오전 9시2분께 코스피200 12월물 콜옵션 및 풋옵션에서 한맥투자증권은 시장 가격보다 현저히 낮거나 높은 가격에 매물을 쏟아냈다. 당시 A증권사 한 애널리스트는 "마켓메이킹 시스템의 단순 거래 오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증권사와 외국인 간 거래로 옵션 순매수에 나오는 것으로 볼 때 '통정거래' 가능성도 의심해 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의 실수나 통정으로 몰기에는 너무나 큰 사건이었다. 구체적인 결론은 나오지 않았지만 시장업계에선 차익거래 자동매매 프로그램에서 오류가 났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우리만의 일도 아니다. 지난 4월 23일(현지시간) 뉴욕주식시장에서 제2의 '플래시 크래시(flash crash·갑작스러운 붕괴)'를 일으켰다. 오후 1시07분50초. AP통신의 트위터 계정에 '백악관에서 두 차례 폭발이 일어났으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다쳤다'는 메시지가 떴다. 순식간에 뉴욕증시에서 시가총액 1360억달러(152조여원)가 증발했다.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단어가 뉴스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나오면 프로그램에 따라 순식간에 주식을 거래하는 알고리즘의 취약성을 다시 한번 드러낸 사건이었다. 당시 오닐증권의 케니 폴케리는 "이번 일은 알고리즘이 뉴스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를 자동매매로 연결시키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것"이라며 "사람들이 대처할 수 있는 틈조차 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많은 기관과 투자자들이 컴퓨터를 통한 자동매매에 의존하는 이유는 뭘까. 지난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인쇄매체를 통한 정보를 기반으로 전화로 주문서를 냈다. 그러나 정보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은 주식시장의 풍경을 완전히 바꿔놨다.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씩 주문을 내는 시스템까지 등장했다. 속도가 곧 수익일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 진 것.
지난 2011년 6월 여의도 증권가를 떠들썩하게 한 스캘퍼(주식워런트증권·ELW 초단타매매) 사건이 대표적이다. 초단타매매란 고성능 컴퓨터를 이용해 1초 사이에 수차례 주문을 내는 주식거래 기법으로 가뜩이나 유럽 재정위기로 휘청거리는 글로벌 주식 시장을 갉아먹는 암적인 존재로 비난을 받고 있다.
증권가 한 관계자는 "거래 수수료율이 낮은 선물이나 옵션은 아예 프로그램된 컴퓨터로 자동 주문을 걸어놓고 초고속 단타매매를 주로 한다"면서 "일명 고주파 초단타매매(High Frequency Trading)다. 유명한 연금 펀드, 뮤추얼펀드나 헤지펀드의 매니저는 대부분 고주파 초단타매매 전문가들이다"라고 귀띔했다.
■'플래시 크래시' 몰고 올 수도
'아차'했을 때는 이미 늦는다. 선물옵션의 경우 레버리지(지렛대)가 커 한순간의 실수로 파산에 이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 증권사, 특히 중소형 증권사의 시스템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평가다. 단적인 예로 지난 2010년 M증권사의 직원 A씨는 미국 달러화 선물스프레드 거래를 위탁받고 단말기를 작동하기 시작했다. A씨는 당시 매수 주문 가격란에 '0.80원'을 넣는다는 것이 그만 '80원'을 입력하고 말았다. 달러화 선물 스프레드 거래는 달러 선물과 현물의 가격 차이를 이용해 수익을 얻는 거래다.
A씨가 무려 100배나 비싼 값에 매수 주문을 했으니 이익을 낼 찬스를 엿보던 다른 증권맨들이 참을 리 없었다. 주문이 나온 지 불과 15초 만에 매도물량이 쏟아지면서 1만5000계약이 체결돼 버렸다. A씨의 한순간 실수로 이 증권사는 120억원의 손실이 발생했다. 다행히 '단순실수였다'는 양해를 얻어 5176계약은 무효 처리됐지만 전액 손실을 피하지는 못했다. 당시 시스템에 경고 장치만 있었더라도 사태가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증권가는 입을 모은다.
이번에 사고가 발생한 한맥투자증권은 자기자본이 200억원대에 불과하고 지난 몇 년간 전산 관련 인력과 운영비용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IT 관련 비용 구축에 들어가는 자금은 일회성 비용이 아니라 전산 시스템 구축 이후 꾸준히 집행돼야 한다"면서도 "중소형 증권사 내부의 IT 인력 부족 등으로 민첩하게 대처하지 못한 부분도 있다"고 털어놨다.
불황에 빠진 한국 증권산업의 현주소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금융감독원 집계를 보면 올해 상반기(4~9월) 62개 증권사 중 적자를 낸 곳이 전체의 41.9%인 26곳. 적자 총액은 1921억원에 이르렀다. 적자 증권사 수는 지난해 같은 기간 15개에서 11곳이 더 늘었다.
증권업계가 명퇴, 조퇴 등을 통해 구조조정에 나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컴퓨터가 꿰찼다. 전구택 현대증권 부장은 "증권업계가 불황에 빠져 있다 보니 많은 증권사들이 인력을 줄이고 자동화 프로그램에 의존하고 있다"면서 "한마디로 '기계(프로그램)'의 역습이라 할 수 있다"고 걱정했다.
더 큰 문제는 자동매매시스템이 개미들로 하여금 기관들과 대등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편에선 자동화를 지나치게 비난하거나 규제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자본시장 한 관계자는"유동성을 공급하는 긍정적 역할도 한다"며 "무조건 자동화매매를 규제하려 한다면 금융시장에 역효과를 불러올 것"이라고 말했다 .
kmh@fnnews.com 김문호 김용훈 기자
■알고리즘(algorithm) 매매는 컴퓨터 시스템에 주가와 수량·시간·시장상황 등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매매주문을 내는 거래를 뜻한다. 가장 중요한 것이 속도이기 때문에 통상 직접주문전용선(DMA)를 통해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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