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천=특별취재팀】 지난 18일 오전 7시 인천항 제1부두. 안개가 짙게 내려앉은 새벽 바다를 뚫고 대형 크루즈선 한 대가 미끄러지듯 부두로 들어왔다. 이날 정박한 크루즈선은 프랑스 국적 4만t급 규모의 '세븐 시즈 보이저(Seven Seas Voyager)'호였다. 선박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면 4만t급이 어느 정도 큰 것인지 선뜻 가늠이 되지 않겠지만 이 배는 길이(전장) 204.2m, 너비(전폭) 28.8m에 이른다. 승객은 총 708명을 태울 수 있고 승무원까지 더하면 1100명이 넘는 사람이 탑승할 수 있다. 아름다운 내부시설 덕분에 '움직이는 6성급 호텔'이라고 불린다.
■크루즈 관광객은 늘지만…
최근 부산항과 인천항을 중심으로 크루즈선의 한국 기항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해양수산부는 지난해 크루즈선을 타고 제주.부산.인천 등 국내 항만으로 들어온 관광객이 총 79만5603명이라고 밝혔다. 지난 2012년 28만2000명에 비해 2.8배 늘어난 것이다. 지난해 크루즈선 입항횟수도 414회에 달해 1년 전(226회)에 비해 2배가량 증가했다.
크루즈 관광객이 대부분 부유한 중장년층이어서 소비 규모도 큰 편이다. 지난해 크루즈선 관광객의 국내 소비액은 최소 4400억원이 넘는 것으로 집계됐으며 1명당 평균 55만원을 소비한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한국으로 오는 주요 크루즈 관광객인 중국인의 경우 1명당 평균 105만원을 한국에서 소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크루즈선이 정박하자 관광버스들이 부두에 즐비하게 늘어섰다. 이들을 맞이하러 나온 관광 가이드의 모습에서도 크루즈에 대한 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아침 8시 30분이 되자 세븐 시즈 보이저호에서 관광객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들에게는 특징이 있었다. 50대 이상의 중장년층이라는 것.
부두에서 만난 크루즈 관광 가이드는 "한번 크루즈 여행을 시작하면 짧게는 1주일, 길게는 한 달 넘게 여행을 하게 된다"며 "최고급 호텔과 같은 크루즈선에서 한 달 넘게 투숙하려면 엄청난 돈이 든다. 비용 문제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크루즈 여행을 하기 힘들고 부유한 중장년층이 관광객의 주류를 이룬다"고 설명했다.
크루즈 관광객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희망적이지만 아직 우리나라 항구들은 크루즈 관광객을 맞을 준비가 돼있지 않아 보였다. 인천항 앞에는 선원들과 직원들이 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허름한 식당이 일부 있지만 크루즈 관광객들이 음식을 즐길 만한 식당이나 쇼핑을 할 수 있는 시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컨테이너를 옮기는 대형 트럭이 쉴 새 없이 지나 다녀 크루즈 여행의 낭만을 훼방 놓는 '어글리 항구'로 비칠까 걱정될 정도였다.
크루즈 관광 가이드는 "인천항으로 들어온 크루즈 관광객 가운데 항구 주변에서 관광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며 "대부분 차를 타고 곧바로 서울로 이동해 반나절 정도 관광 및 쇼핑을 한다. 주요 관광지는 경복궁과 남대문시장, 광장시장 등"이라고 설명했다.
크루즈법에서 핵심으로 꼽고 있는 항구 배후단지 활성화와 입지 규제 완화가 시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날 세븐 시즈 보이저호를 맞이하러 나온 40인승 대형 버스는 총 23대였지만 이 가운데 인천을 관광하는 버스는 1대뿐이었다.
크루즈 관광객을 유치하는 입장에서 시간은 곧 돈이라고 할 수 있다. 대형 크루즈선이 정박해 항구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야 10시간 정도다. 관광과 쇼핑을 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시내 관광과 쇼핑 공간을 가진 부산이나 서울에서 가까운 인천은 그나마 크루즈 관광객을 유치할 수 있는 조건이 되지만 동해나 목포 등 지방 중소도시는 크루즈법 통과를 통해 정부 지원을 받지 않는다면 항구 인근에 크루즈 관광객을 위한 관광 및 쇼핑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실패한 국적 크루즈선 도전
한국을 방문하는 크루즈선은 늘어나고 있지만 90% 이상이 체류기간 하루 미만인 단순 기항이다. 부산과 인천 등 국내항을 모항으로 이용하는 크루즈선은 현재 전무한 상황이다. 모항에 3만t급 국적 크루즈 1척을 투입할 때 경제효과는 902억원, 고용효과는 968명에 이르는 것으로 분석된다. 또 크루즈선 모항의 1인당 평균 지출액은 259달러인 반면 기항지는 126달러에 그친다. 크루즈 산업을 통해 경제효과를 보려면 기항지로는 한계가 있고 모항지가 돼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동안 국내항을 모항으로 하는 국적 크루즈에 대한 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부산항을 모항으로 지난해 출항한 2만6000t 규모의 하모니크루즈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기대한 것과 같은 성과를 올리지 못한 채 출항 1년 만에 운항 중단을 선언했다. 쌓여만 가는 적자가 400억원을 넘기자 두 손, 두 발 들고 포기한 것이다.
과거 하모니크루즈에서 일한 바 있는 해운업계 관계자는 "크루즈 사업의 핵심은 사람들이 배에서 즐길 수 있는 선상 엔터테인먼트 콘텐츠 확보"라며 "하모니크루즈는 스파 등 3~4가지 프로그램을 갖고 운항했지만 핵심 콘텐츠인 카지노가 법적으로 막히면서 수익을 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하모니크루즈는 전용 크루즈선이었기 때문에 선상 카지노 시설을 갖추고는 있었지만 사용해보지도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퇴직한 하모니크루즈 직원에 따르면 현재 하모니크루즈를 운영하던 임직원들도 모두 퇴사했고 배는 목포항과 광양항을 오가며 매각만을 기다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구매를 타진하는 사람조차 없다는 전언이다.그는 "하모니크루즈가 실패로 돌아갔지만 국내에는 여전히 크루즈 사업을 해보겠다는 해운업자들이 많이 있다"며 "크루즈법이 4월 국회에서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는 희망적인 소식이 전해지고 있어 해운업계 기대가 크다. 한국에서 크루즈 산업이 시작되려면 크루즈법이 통과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