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History)에는 이야기(story)가 녹아 있다. 세월의 층이 두터울수록 이야기의 내용은 더 풍성하다. 아무리 오래된 것도 한때는 새것이었다.
시카고 컵스의 홈구장 리글리필드가 지난주(4월 23일) 개장 100주년을 맞았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이 야구장(첫째는 보스턴의 펜웨이파크)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녹아 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한다.
■세상이 놀란 베이브 루스의 예고 홈런
1932년 월드시리즈 3차전. 4-4 동점 상황. 홈런왕 베이브 루스(사진)가 타석에 들어서자 야유가 쏟아졌다. 관중이 던진 레몬조각이 루스의 얼굴을 가격했다.
다혈질의 루스는 돌연 손가락을 들어 센터 펜스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바로 그 지점으로 투수(찰리 루트)가 던진 공을 날려 보냈다. 그 유명한 예고 홈런이다. 투수 루트는 죽을 때까지 예고 홈런이란 없었다고 주장했다.
■잔혹한 너무나 잔혹한 염소의 저주
1945년 월드시리즈 4차전. 윌리엄 시아니스라는 사내가 염소를 이끌고 야구장을 찾았다. 매표소 직원은 염소와 함께 입장할 수 없다고 그를 거부했다. 시아니스는 "두 번 다시 이곳에서 월드시리즈가 열리지 않으리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그게 뭐 대수냐고? 실제로 컵스는 이후 단 한 번도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다. 특히 2003년 플로리다와의 내셔널리그 챔피언시리즈가 뼈아팠다. 3승 1패로 다 잡은 시리즈를 3번이나 내리 패하는 바람에 놓쳤다. 염소의 저주는 간단히 풀리지 않는다. 컵스는 1908년 이후 한 번도 우승을 못하고 있다.
■마침내 밝혀진 조명탑
메이저리그에 첫 야간 경기가 열린 해는 1935년. 이후 모든 야구단이 TV 시청률이 높은 야간으로 경기 시간을 옮겼다.
하지만 컵스만은 예외였다. 시카고 시민들의 결사 반대 때문. 2차 대전 중 조명탑 설치비용을 모두 전비로 기부한 시민들은 높은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야간 경기가 열리면 주민들의 일상을 방해한다는 여론도 합세했다.
1988년 8월 8일 드디어 리글리필드 조명탑에 불이 켜졌다. 원정팀(필라델피아) 1번 타자 필 브래들리가 기분 좋은 마수걸이 홈런을 때렸다. 하필 내리기 시작한 비로 중단. 결국 공식 경기는 다음날로 미루어졌다.
■Take me out to the ball game
미국에선 이 노래를 모르면 간첩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야구장에 가기 시작하면서 수없이 듣게 되는 노래다. 원조는 리글리필드다. 원조와 타 구장의 차이점은 선창에 있다. 7회 초가 끝난 후 스트레칭 타임(seventh inning stretch) 때 관중 가운데 한 사람이 선창을 하면 모든 사람이 따라 부른다. 1회부터 마신 맥주로 어지간히 취해있는 4만 관중의 대합창은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1908년 이 노래를 작사한 잭 노워스나 작곡가 본 티즈리는 야구장에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리글리필드와 한국인 선수들
박찬호(당시 LA 다저스)는 1996년 4월 7일 리글리필드서 생애 첫 승을 거뒀다. 구원투수로 나와 4이닝 무실점으로 호투. 이곳은 또 지난해 류현진(LA 다저스)이 10승째를 올린 곳이기도 하다. 5⅓이닝 2실점. 임창용(당시 시카고 컵스)이 지난해 9월 8일 37세의 나이로 메이저리그 데뷔전을 치른 곳도 리글리필드다. 컵스의 138년 역사상 두번째로 나이 많은 신인이었다.
2003년 24세의 최희섭(당시 시카고 컵스)은 3경기 연속 홈런으로 4월의 신인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6월 8일 이곳에서 내야플라이를 잡으려다 투수와 부딪혀 뇌진탕을 일으키고 만다. 그 일만 없었더라면. 인생은 아쉬움의 연속이다.
texan509@f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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