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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퓰리처상이 환기시키는 소박한 원칙

[fn논단] 퓰리처상이 환기시키는 소박한 원칙

국가와 개인은 어떠한 관계 속에 있는가. 아마도 봉건시대라면 그 국가는 하늘의 명을 받든 사람에 의해 통치된다고 했을 것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됐을 때 세종이 그가 창제한 한글로 의도했던 가장 중요한 사업 중의 하나가 '용비어천가'란 악장을 짓는 것이었다. 용비어천가란 조선 창업에 대해 주로 중국 고사에 비유해 찬송한 것으로서 그 핵심 주제어 중 하나는 천우신조였다. 하늘이 도와 이룬 국가라는 인식을 심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하늘이 도왔는데 어떻게 인간이 그 국가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겠는가. 이때 국민은 다스림을 받는 백성의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광복이 되고 분단이 되면서 총선을 통해 국회가 구성됐고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세워졌으며 이른바 근대적 정치체제가 수립되면서 왕의 개념은 사라졌다. 그 자리에 대통령이 들어서면서 대통령은 하늘이 내려준 자리가 아니라 국민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회계약설의 개념이 보편화하기 시작했다. 이때 국가와 국민의 관계는 다스림의 관계가 아니라 주권의 양도와 함께 국가는 국민의 공복이고 국민은 국가의 주인이라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그 '공복으로서의 정부'는 하나의 이념에 불과할 뿐 실제로는 여전히 왕의 개념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선거를 통해 국민의 표를 구해 권력을 잡았지만 일단 잡고 나서는 공복으로서의 자기 존재를 부정하고 오히려 국민 위에 군림하려고만 했다. 그 과정에서 국민의 기본권은 처참하게 유린됐다.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듯이 유린된 기본권을 회복하기 위한 다양한 저항이 상존했다. 그 결과 우리 사회는 상당한 민주적 진전을 볼 수 있었다.

언론 또한 민주적 진전을 위한 저항에 인색하지 않았고 우리 사회의 언론자유를 위해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투신했다. 19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과 그 이후의 사례에서 보듯 언론인들은 국가의 힘이 비대해질 때마다 개인의 기본권 보장을 위해 누구보다도 선두에 나서 싸웠으며 그로부터 국가와 개인의 균형점이 간신히 이뤄질 수 있었다. 매사에 균형이 중요했던 것이다.

미국에도 의당 이러한 언론인이 있을 법한데 대표적인 사람으로 조지프 퓰리처를 들 수 있다. 그 역시 국민의 자유와 알 권리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언론인으로서 가히 입지전적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신문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그는 "언론인은 다리 위에서 국가라는 배를 감시하는 사람이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또 "신문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르치는 도덕 교사다"라고도 말했다. 신문에 폭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야말로 지금까지 만들어진 그 어떤 법률과 도덕보다 더 많은 범죄를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근 '저널리즘의 아카데미상', 혹은 '언론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퓰리처상 수상위원회는 공공서비스 부문 수상자로 미국 워싱턴포스트지의 바튼 겔먼과 영국 가디언지의 글렌 그린월드 등 3인을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미 국가안보국(NSA)이 동맹국이나 적대국 가릴 것 없이 수십개국의 민간인, 정치인, 기업인의 통화, e메일을 감청했다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폭로했기 때문이었다.
퓰리처상 수상위원회는 이 같은 수상 결정이 아마도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국가의 침해와 폭력을 견제할 수 있는 하나의 균형추 역할을 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을까.

이들에 대한 수상이 안보라면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바로 그 미국에서 주어졌기에 보다 더 빛나는 것 같다. 이 퓰리처상 수상 소식은 우리 사회의 언론인들에게 이제는 해묵은 하나의 원칙을 새삼 환기시켜 주는 것 같다.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국가와 개인의 자유와 관련된 보도들에 대해 어느 한 쪽에 편향되지 않고 하나의 균형점을 찾아야 할 것이라는 소박한 원칙 말이다.

김진기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