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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나루] 주홍글씨

[여의나루] 주홍글씨

지금 브라질에서는 월드컵 축구경기가 한창이다. 안타깝게도 우리 대표 팀은 졸렬한 경기 끝에 16강 진출이 좌절됐다. 지난 1998년 미증유의 외환위기로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아 시름에 빠져 있던 시절 박세리 선수가 US여자오픈 우승으로 우리 마음을 달래줬듯이 우리 축구선수들의 승전보로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씻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었다.

세월호 참사가 있던 그날 우리는 슬픔과 분노를 그리고 죄의식을 느꼈다. 그러면서 다시는 이런 참사가 나지 않도록 한목소리로 모든 것을 바꾸고 고치자고 했다. 벌써 두 달 보름여가 지났다. 그동안 우리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어떻게 바꾸어야 하는지, 그리고 이 아픔을 어떻게 씻어내야 하는지를 깊이 고민하고 해결책을 한 가닥씩이라도 엮어냈어야 했다. 그런데 별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오죽하면 월드컵 16강 얘기를 하겠는가?

참사가 난 후 지금까지 언론보도를 보고 있으면 사건 연루자들이 속한 집단을 분풀이하듯 범죄집단으로 몰고 가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과연 이런 방식이 우리가 바라는 문제의 해결과 아픔을 달래는 최선의 길인지 반드시 짚어봐야 한다.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에 대해선 엄중한 처벌은 마땅한 일이고 추호도 느슨함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화풀이하듯 아무나 범죄집단화 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안 된다.

가령 '관피아·해피아·세피아·법피아'가 그렇다. 정말 부적절한 용어다(아니 국가에 봉사하는 공직자가 교황이 파문을 선언한 마피아와 같다는 말인가). 어쭙잖은 공무원 출신 중 몇몇이 탐욕스러운 기업과 유착해 부정을 저지른 것이다. 그들을 엄히 다스리는 것을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처벌을 넘어 다시는 이런 참사를 막자고 하고 있지 않나. 사고 원인이 사회에 뿌리깊게 쌓여온 적폐 때문이라면 그 원인을 샅샅이 파헤치고 해결방안을 마련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고 또 얼마나 오래 걸릴 것이겠는가. 국가개조에 준하는 시스템의 개선, 혁신을 선언한 지 오래건만 무엇을 하는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폭넓게 나누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온통 범죄자들을 찾아내고 잡아내기에 급급한 형국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압수수색이고 감사 중인 기관은 또 얼마나 많으며 도주로가 어떻고 이제 민간인을 잡자고 군인까지 동원하는 초유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과 조직에 주홍글씨를 새겨야 막이 내려질지 정말 걱정이 된다. "이제 좀 조용히 정리해 주었으면 한다"는 어느 유족의 인터뷰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의 글에서 세월호 참사는 기업의 탐욕, 당국의 안이하고 나태한 관리감독, 그리고 그들 간의 유착, 재난.구조의 일사불란한 체계의 부재, 부정확한 보도로 혼란과 혼선을 가중시킨 언론 등의 문제가 한꺼번에 얽힌 사건이라고 했다. 지금 우리는 이 큰 가닥의 문제들을 잘게 썰어 꼼꼼하게 문제들을 찾아내고 해결방안들을 마련해야 한다.

필자가 뉴욕에 있었던 1990년대 중반쯤 프랑스로 하계연수를 가는 고등학생들이 탄 비행기가 롱 아일랜드 근처에서 추락해 탑승객 전원이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미사일 테러냐 정비 불량이냐가 문제가 됐다. 그들은 거의 1년에 걸쳐 바다에서 비행기 파편을 건져 한 조각 한 조각씩 맞춰 비행기를 복원하면서 사고 원인을 밝혀냈다. 하물며 비행기 사고원인을 밝히는 데도 1년이 걸리는 데 사회 전체의 적폐를 없애고 국가를 개조, 혁신을 하려하면서 우리가 조급해서야 되겠는가. 지금은 화풀이하듯 누구에게 주홍글씨를 덧칠할 때가 아니라 인내심을 갖고 문제점을 찾으며 해결책을 마련할 때라 생각한다.

정의동 전 예탁결제원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