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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n논단] 등장과 퇴장

[fn논단] 등장과 퇴장

국립극장에 엉덩이를 들이밀며 뒷모습으로 등장했던 배우가 있었다. '로맨스 파파' '마부'라는 영화로 상징되는 김승호 선생의 연극배우 때 이야기다. 당시의 관객들에겐 큰 엉덩이를 들이대며 거꾸로 걸어 나오는 모습이 신선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선생은 이미 등장부터 한국영화의 전설이 될 자질을 품고 있었던 모양이다.

셰익스피어의 말처럼 인생은 연극이고 인간은 모두 배우다. 한평생 우리는 배역을 바꿔가며 이런저런 무대로 옮겨 다니고 등장과 퇴장을 거듭한다. 데이트 때 첫인상이 중요하듯 첫 등장이 좋아야 주위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일도 잘 풀린다. 등장과 퇴장은 세상살이에 깊은 의미를 품는다.

드라마 '첫사랑'을 만들 때 인기 정상의 청춘스타 최수종의 친구 역에 완전 무명인 신인을 캐스팅했다. 감독으로선 부담이 컸다. 궁리 끝에 사내를 인상적으로 등장시키려 그가 잘한다는 탁구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탁구실력이 이에리사 선수와도 시범경기를 할 정도라고 했다. 드라마가 시작되면 잘 생기지도 못한 '듣보잡' 사내가 최수종과 탁구시합을 한다. 사내는 멋진 스매싱으로 스타 최수종을 박살내며 놀려댄다.

"인마, 넌 공부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는데 왜 운동은 꽝이냐!"

시청자들은 이름 없는 탤런트가 운동신경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최수종을 난타하자 당장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내의 등장은 성공적이었다. 그가 바로 손가락으로 코를 튕기던 탤런트 배도환이다. 배우들은 드라마에서 멋지게 등장하고 멋지게 퇴장하고 싶어 한다. 어떤 배우는 특히 죽을 때 멋지게 죽게 해달라고 제작진에 안달을 한다. 러브스토리에선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중인환시 속에 천길 낭떠러지로 뛰어내리길 원한다.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일까.

우리는 살면서 직장과 일터에서 자리를 옮기거나 승진을 하고 새로운 무대에 오른다. 등장은 한 번 실수를 하더라도 만회할 기회가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퇴장은 다르다. 움켜쥐고 있던 힘과 권력, 명예를 놓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세상의 삶 속에서 만나는 퇴장무대의 모습은 멋진 풍경이 드물고 추한 경우가 더 많다. 퇴장하는 모습이야말로 그 사람의 진정한 모습일 것 같다. 어떤 모습으로 퇴장할까를 고민하는 삶이라면 그 과정도 반쯤은 성공적이 될 것이다. 세인들의 기억 속에 오래 남는 것은 등장보다는 퇴장할 때의 모습이다.


칸트는 세상을 떠나며 'Es ist gut(좋았다)'라는 말을 남겼다. 교황 바오로 2세가 마지막 남긴 말씀은 'totus tuus ego sum(저는 전부 당신의 것입니다)'이다. 멋진 말 한 마디 남기고 퇴장한 이들은 그 삶도 아름답게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응진 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