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4월. 스물한살의 대학생 강신일이 남산예술센터 연극 무대에 섰다. 이강백의 작품 '도마의 증언'에서 주인공 '도마'로. 그의 데뷔 무대였다.
34년이 흘렀다. 2014년 11월. 배우 강신일이 다시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 무대에 선다. 김재엽의 작품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에서 주인공 '강신일'로. 연기 인생 처음 자신의 실명으로 무대에 오른다.
서울문화재단 남산예술센터에서 한창 연습 중이던 배우 강신일을 만났다. "그때 이 예술센터도, 무대도 지금보다 크게 보였죠. 34년이 지났네요. 시간이란게 참." 묵직한 그의 음성과 깊이 있는 표정은 말보다 더욱 많은 것을 들려주는 듯했다.
이번 작품에서 강신일은 배우 강신일을 연기한다. 의아하게 들리지만 말 그대로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모두 작가이자 연출가인 김재엽이 벌인 일이다.
"어느 날 내 공연을 보러 찾아온 재엽이가 시인 김수영을 다루는 연극을 구상하고 있는데 제가 꼭 출연을 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대본을 먼저 보자 했더니 머릿속에 구상만 있지 대본을 써놓은 게 없다잖아요. 막연하게 나랑 자기랑 실명으로 등장해서 두 사람이 김수영 시인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려보고 싶다는 거예요."
이 상황은 그대로 연극의 도입부가 됐다. 김재엽과 강신일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만나 같은 대화를 나누다 함께 김수영을 찾아 떠난다. 극중 강신일은 김수영의 시에 담긴 시대로 건너가 그의 삶과 내면을 추적해 간다.
김수영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4.19혁명과 5.16 군사정변 등 격변의 시기를 살아낸 시인이다. 연극 제목도 그의 시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따왔다.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중략)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시구처럼 김수영은 현실에 타협하지 않기 위해 끝없이 스스로를 다그쳤고 늘 권력의 억압을 벗어난 자유를 꿈꿨다.
스물한살 대학생 시절 처음 데뷔한 남산 무대 34년 세월 흐르고 흘러 강신일役으로 다시 올라 … 한국 현대사 질곡 관통한 김수영의 자취 찾는 여행 여정 끝에 마주친 것은 내가 연극을 시작한 이유 시인 김수영
김재엽은 강신일을 두고 '가장 김수영스러운 배우'라고 했다. "처음부터 배우 강신일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구상했다"고 말했을 정도다. 동의하냐는 질문에 강신일은 두 손을 들어 손사래를 쳤다.
"존경하는 시인입니다. 그 시절에 그토록 통렬하게 현실을 직시했고 그 생각을 가감 없이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은 대단한 용기예요. 투명한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죠. 감히 그분과 저의 삶의 궤적을 동일시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분을 생각하면 저는 늘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가 1980~1990년대 극단 연우무대에 속해 출연했던 '칠수와 만수' '늙은 도둑 이야기' '변방에 우짖는 새' 등은 모두 당시 암울했던 사회상을 반영한 풍자물이다.
"극단의 목적이 투쟁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처한 현실과 시대에 대한 생각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해야 한다는 극단의 방향에 동의했어요. 재엽이 처음 본 작품도 '칠수와 만수'였다고 해요. 당시 대학생이었던 재엽이 눈에는 무대 위의 강신일이 김수영과 같은 인물로 보였을 수도 있겠죠."
작품 속에서 배우 강신일이 김수영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은 뭘까.
"강신일이 김수영의 삶과 그의 내면에 밀착해 가는 과정에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죠. 그 시절과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지만 그는 이 작품이 그다지 직설적이고 무겁진 않다고 강조했다.
"연극이 사회에 반하는 목적을 갖고 관객에게 다가가는 것은 굉장한 부담일 수 있어요. 연극은 일단 재미가 있어야 하고 그 안에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죠. 이 두 가지의 균형을 잘 맞추는 작업을 지금껏 해왔고 결과적으로 굉장히 재미있는 연극이 됐다고 자신해요."
마지막으로 34년 만에 데뷔 무대로 돌아와 스스로를 연기하게 된 그의 마음이 궁금했다.
"막 데뷔를 해서 증언이란 극단에 있을 때 열성적으로 거의 매주 순회공연을 다녔어요. 교도소, 부대, 학교, 병원, 나환자촌을 가리지 않고 전국 오지를 다 돌아다녔죠. 20대 때는 할 줄 아는게 연기밖에 없으니 연극을 통해 사회에 기여를 해보자 하는 생각이었어요. 그 무대들 덕분에 젊은 시절을 그래도 조금은 덜 부끄럽게 보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 작품을 하면서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그때를 돌이켜보게 됐어요. 내가 왜 연극을 시작했는지."
작품의 부제는 '내 안의 김수영을 찾아서'다. 그가 찾은 김수영은 결국 34년을 돌아 만난 강신일 자신이 아니었을까.
seilee@fnnews.com 이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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