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은 추억을, 아이는 미래를… 이것이 태권브이의 매력"
디즈니처럼 토종 만화영화 늘 꿈이자 숙제
마징가Z 참고했지만 투구 등은 한국풍으로
외환위기때 다시 돌아온 태권브이에 감격
우리 전래동화 애니메이션이 남은 꿈
▲지난 15일 서울 고덕동에 문을 연 로보트태권브이 박물관 '브이센터' 개관식에 참석한 김청기 감독은 '성공한 큰 아들을 보는 것처럼 자랑스럽고 가슴이 벅차다'고 말했다. 사진=서동일 기자
"날아라 날아 로보트야, 달려라 달려 태권브이." 어른들이 "노래 하나 해봐"라고 주문하면, 다섯살 난 아들은 기다렸다는 듯 목청껏 부르기 시작한다. 시킨 사람이 되레 깜짝 놀랄 만큼 큰 목소리로. '두팔을 곧게 앞으로 뻗어' 제자리 달리기도 한다. 결의에 찬 그 당당한 표정. 이미 정의를 위해 싸우는 로보트태권브이가 돼 있다. 지난 15일 서울 고덕동에 '브이센터'가 문을 열었다. 로보트태권브이를 테마로 한 국내 유일의 체험형 박물관이다. 입구에 세워진 15m 크기의 로보트태권브이를 보는 순간, 반가운 마음과 아들 생각이 교차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또 다른 아버지를 만났다. 1976년 로보트태권브이를 탄생시킨 김청기 감독. 거대한 아들을 눈앞에 둔 75세 아버지는 감격에 젖어 있었다. "성공한 큰 아들을 보는 것처럼 자랑스럽고 가슴이 벅차. 눈물이 울컥 나올 뻔했다니까." 울컥한 게 어디 김 감독뿐이겠는가. 동행한 40대 사진기자 역시 브이센터를 들어서자마자 "내가 왜 이리 울컥하지"한다. 7080세대에게 태권브이는 특별한 존재다. 지금의 '어벤져스'와 댈 수도 없다. 시원한 돌려차기로 적을 무찌르는 거대 로봇. 작은 나라, 약소국의 설움을 한 방에 날려주던 '무적의 우리 친구'가 아니던가. 그러보 고니 태권브이 나이가 벌써 서른아홉이다. 첫 토종 로봇 애니메이션 '로보트태권브이'가 개봉한 건 지난 1976년 7월 24일,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에서다.
―그날을 기억하나.
▲어떻게 잊겠나. 극장 앞에 몰려든 인파가 엄청났다. 그 광경을 보면서 이제 돈 벌 일만 남았구나 했다.(웃음)
―로보트태권브이는 대한민국 로봇 1호이고, 감독님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디즈니처럼 우리 토종 장편만화를 만드는 게 늘 꿈이고 숙제였다. 나는 태권브이가 탄생하기 7~8년 전부터 애니메이션 제작을 했다. 당시 CF 속에 등장하는 애니메이션은 전부 내가 그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영상·편집 기술을 배우고, 스토리텔링에 대한 연구도 많이 했다. 태권브이는 그 모든 역량의 총집결체라고 보면 된다.
―왜 거대로봇인가.
▲당시 아톰, 마징가Z가 인기였다. 모두 일본 만화다. 반공·극일 사상이 충만할 때였다. 일본 문화가 들어와 아이들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늘 불쾌하고 두려웠다. 그래서 우리 것 만들자고 후배들과 의기투합했다. 우선 태권도라는 정체성을 내세워 인간형 로봇을 설정했다. 거대로봇이 돌려차기, 공중차기를 하면 얼마나 통쾌하고 멋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크기는 63빌딩만 하다고 막연히 설정했는데 나중에 복원하는 과정에서 54m라는 정확한 수치를 팬들이 정해줬다.
―디자인은 어떻게 했나.
▲당시 스튜디오가 광화문 사거리에 있었는데, 매번 지나다니면서 이순신 장군 동상을 만났다. 늘 당당하고 위대한 모습이 마음에 와닿아 은연중에 로보트태권브이에 이순신 장군의 위엄이 용해됐다. 특히 태권브이가 쓰고 있는 투구의 모습은 이순신 장군의 모습에서 그대로 따왔다. 사실 그때는 캐릭터 전문 디자이너도 없고, 국내에는 참고할 자료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마징가Z나 아톰의 디자인을 분석하고 연구했다. 하지만 가장 중점을 둔 것은 그 디자인을 최대한 배제하고 내 것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로보트태권브이'는 3주 만에 28만명 관객을 동원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같은 해 12월 속편 '로보트태권브이 우주작전'이 나왔고 '로보트태권브이 수중특공대'(1977년), '로보트태권브이와 황금날개의 대결'(1978년), '슈퍼태권브이'(1982년), '태권브이 84'(1984년), '로보트태권브이 90'(1990년)까지 총 7편의 시리즈가 이어졌다. 태권브이 외에도 그는 '똘이 장군' 시리즈와 '외계에서 온 우뢰매' 시리즈를 제작했다. 모두 엄청난 인기를 끈 작품이다. 그런데 그는 1990년대 초 돌연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태권브이도 함께 자취를 감췄다. 뜻밖의 이유였다.
―태권브이 명맥이 갑자기 끊어졌다.
▲1990년대 들어서 갑자기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았다. 이유는 지금도 알 수 없다. 아이들을 위해 영화관도 운영하고, '월간 우뢰매'라는 잡지도 발간할 때였다. 평생 아이들을 위해 살았고, 돈을 벌어도 다시 아이들을 위한 작품을 만드는 데 썼다. 그런데 모든 걸 가져갔다. 살고 있던 집까지 차압이 들어왔다. 충격이 컸고, 화도 많이 났다. 그래서 붓을 내려놨다.
잊혀졌던 태권브이가 다시 나타난 건 2000년 즈음이다. 외환위기가 한국을 덮치며 온 나라가 한창 어려웠던 시기, 태권브이가 돌아왔다.
―왜 마음을 바꿨나.
▲1998년 즈음 한 방송매체와 인터뷰를 하게 됐는데 그때 PD가 하는 말에 크게 공감이 갔다. 한국인에게는 태권브이가 꿈이고 미래의 모델이었는데 외환위기 때 태권브이 부활은 필연이라고 했다. 이미 인터넷상에서는 자체적으로 태권브이 부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을 때였다. 그때 '내가 뭐 처음부터 돈을 바라고 태권브이를 만들었나, 아이들의 꿈을 되살려보자'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일어섰다.
2005년 '로보트태권브이' 만화가 디지털 영상으로 복원됐다. 수십명의 사람이 원본 필름을 한 장 한 장 수작업으로 되살려냈다. 3년간 10억원이 투입된, 길고도 어려운 작업이었다. 그리고 지난 2007년 '로보트태권브이'는 30년 만에 극장에서 재개봉했다. 30년 전 초등학생이었던 사람들이 아들딸 손을 잡고 극장을 찾아 서른이 된 태권브이와 마주했다.
"지금 로봇을 만드는 박사들 중에 이른바 '태권브이 키즈'들이 많아. 과거에 태권브이를 보고 꿈을 키운 거라고. 어른들은 태권브이를 보며 과거의 추억에 젖고, 아이들은 태권브이를 통해 미래를 보는 게 얼마나 좋아."
―태권브이가 세대를 아울러 사랑을 받는 이유는 뭐라고 보나.
▲월트 디즈니의 이야기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아무리 악한이라도 아이들의 정서를 해치는, 영혼을 파괴하는 사악함은 그리지 말라"는 거다. 태권브이에 등장하는 악당 '카프 박사'는 난쟁이다. 학술대회에서 조롱을 받고 웃음거리가 되면서 거기서 지구를 정복하겠다는 적개심을 품었다. 지금도 왕따가 화두가 되고 있다. 악당이어도 동정이 간다. 악당 카프 박사의 딸은 사이보그 기계인간 '메리'다. 메리는 훈, 영희와 교류하며 인간에 대한 눈을 떠간다. 지금도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는 얘기다. 나는 '모든 과학이 인간 위에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판타지물이어도 휴머니즘을 담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김 감독은 태권브이를 떠나보낸 지 오래다. 10년 전 태권브이에 대한 모든 권리를 영화제작사인 신씨네 신철 대표에게 넘겼다. 신 대표는 지난 2006년 '주식회사 로보트태권브이'를 설립, 태권브이의 부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 감독은 "이제 내가 할 일은 없어. 더 좋은 곳으로 보내줘야지"라고 했다.
―태권브이에 미련은 없나.
▲이제 태권브이도 트랜스포머, 아이언맨과 같이 3차원(3D) 애니메이션으로 기가 막히게 되살아날 것이다. 지금 세대에 맞춰 변신을 할 수도 있겠지. 태권도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으면 세계화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미 10여년 전 미국에 수출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나는 그 성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김 감독은 태권브이를 추억하며 수묵화로 그린다. 태권브이가 한국의 산수화 안에 등장하는 '엉뚱 산수화'다. 이미 70여점이 모여 내년 1월께 전시회도 열 계획이다.
"태권브이가 1970년대보다 더 이전으로 가는 거야. 조선시대, 한복을 입고 정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한테 태권브이가 찾아가고 사람들은 놀라서 도망치지. 원래 내가 좀 엉뚱하잖아. 하하."
태권브이를 떠나보낸 노장은 이제 또 다른 꿈을 꾼다. 심청전, 흥부와 놀부, 별주부전, 선녀와 나무꾼과 같은 한국의 전래동화를 2차원(2D) 애니메이션으로 되살리는 일이다. 그는 꿈 이야기에 오랜 시간을 할애했다. 힘을 실어달라는 진지한 부탁도 덧붙였다.
―왜 전래동화인가.
▲내가 죽으면 누가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초가집에서 한복을 입고 짚신, 고무신을 신어보고 자란 내가 우리 전래동화를 디즈니의 피터팬, 백설공주와 같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고 싶다. 그런 고전영화는 몇 세기가 지나도 사랑받는다. 국내에 해외 애니메이션을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으로 몇 십년 동안 작업한 국내 애니메이터들이 허다하다. 그들은 세계적 애니메이션을 만들었지만 이제 모든 것이 컴퓨터그래픽으로 바뀌면서 실직자가 됐다. 더 늙기 전에 그들과 함께 30~40년의 노하우를 모두 쏟아부어보고 싶다. 디즈니가 흉내낼 수 없는 색, 흉내낼 수 없는 내용을 만들 자신이 있다.
그는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지원을 받기 위해 스토리보드를 만들어 제출해보기도 했지만 번번이 탈락했다. 첨단 3D 애니메이션이 아니라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동양 회화는 선의 문화예요. 3D 애니메이션으로는 우리의 선의 아름다움을 되살릴 수 없어. 2D 애니메이션은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있어. 남녀노소, 인종, 국가를 초월하지. 세계 아이들이 즐겁게 보면서 우리의 전통문화, 우리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겠지. 한국에 좋은 유산, 보물이 될 거야. 심청이, 흥부, 토끼 캐릭터로 크루즈선도 만들고 테마파크도 만들면 얼마나 좋겠어.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어. 지원만 받을 수 있다면 나는 연봉이 1원이라도 상관 없다고."
인터뷰를 마치며 김 감독에게 사인을 부탁했다.
손을 흔드는 '깡통로봇'부터 슥슥 그려넣는다. 빠르지만 따뜻한 손놀림. 태권브이가 특별한 영혼을 가진 건 그 따뜻함 때문이지 않을까 문득 생각했다. 그가 새로운 영혼을 불어넣을 심청이와 흥부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seilee@fnnews.com 이세경 기자
■김청기 감독 프로필
△74세 △1976년 '로보트 태권브이'로 데뷔 △'똘이장군' '은하함대 지구호' 연출 △'고우영의 삼국지' 연출 △'다윗과 골리앗' 제작 △'로보트태권브이 84' 제작 △영화 '우뢰매' 제작·연출 △영화 '슈퍼 홍길동' 제작 △'로보트태권브이 90' 제작·연출 △영화 '우주경찰 휴먼파워' 제작 △'의적 임꺽정' 연출 △청강문화산업대 컴퓨터게임과 겸임교수 △문화콘텐츠 앰배서더 대표,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운영위원, 제8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 페스티벌 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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