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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희망을 여는 사람들] 동대문시장 청년상인 "동대문 시장은 청년 의류디자이너의 준비무대죠"

디자이너스클럽·청평화 등동대문 시장·상가 대부분 오후 8시~ 새벽 5시 영업
中 매출, 전체 80% 차지

"뚜어샤오치엔(多少錢)." 여기저기서 중국어가 들려온다. 상인이 능숙하게 중국어로 가격을 흥정한다. 한참 승강이 끝에 가격협상이 끝났는지 어느새 물건이 지게꾼에게 실려 있다. 중국에 있는 한 쇼핑몰로 착각할 정도로 예전에 비해 중국인이 많이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물건을 고르고, 한 푼이라도 더 깎고 더 받으려는 줄다리기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 여기는 서울 동대문시장이다.

[새해 희망을 여는 사람들] 동대문시장 청년상인 "동대문 시장은 청년 의류디자이너의 준비무대죠"
동대문시장은 디자이너 등의 꿈을 키우기 위한 청년들의 활동무대이기도 하다. 쇼핑몰 'Cre8'에서 디자이너로 일하는 이정광씨가 동대문에서 구입한 의류 부자재를 살펴보며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사진=이진혁 수습기자


■호시절 지났지만, 중국인 때문에 그나마…

자정을 훌쩍 넘긴 지난 3일 새벽. 서울 지하철 1호선과 4호선이 만나는 동대문역, 2·4·5호선이 교차하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인근은 한밤중임에도 환하게 불이 켜져 세상을 밝히는 커다란 인공섬처럼 보인다. 마치 우주선을 연상케하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까지 오버랩돼 더욱 그렇다.

동대문시장에 속해 있는 유어스, 디자이너클럽, 누존, 청평화 등 대부분의 상가는 오후 8시에 문을 열어 새벽 5시 정도까지 장사를 한다. 서울 하늘 아래서 남들이 자는 시간에 깨어 세상을 밝히는 몇 안 되는 곳 중 하나다.

인근 광장시장은 일제강점기인 1905년에, 동대문시장의 모태인 평화시장은 6·25전쟁 이후 서서히 현대적인 시장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으니 남대문시장과 함께 서울의 대표 시장으로서 위치를 점한 지는 꽤 오래다.

특히 이곳에는 수년 전부터 중국인 상인과 관광객들이 몰려오면서 '차이나타운'을 무색케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나는 거리마다 한국어보다 중국어가 더 많이 들려왔다.

유어스에서 여성복 도매점 'a.second'를 운영하고 있는 김지영씨(33)는 "수년 전만 해도 한국과 중국 매출이 약 절반씩이던 게 지금은 중국 사람들 매출이 전체의 80%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늘어났다"고 전했다.

내국인 매출이 감소한 자리를 중국인들이 차지했지만 경기 침체 탓에 전체 매출은 줄었다.

특히 내국인을 상대로 하는 업종은 더욱 그렇다. 지방에 있는 소매업자들에게 의류 등을 배송하는 사람을 뜻하는 '사입삼촌'의 일감도 눈에 띄게 줄었다.

쇼핑몰 앞에 진주, 광주, 원주 등 지방도시의 이름이 씌어 있고 이들 팻말 앞에 쌓아놓은 짐꾸러미를 사입삼촌들이 지방으로 보내는 것이다.

유어스 앞에서 경남 진주로 의류를 주로 배송한다는 최호준씨(36)는 "일감이 (전년보다) 60%나 떨어진 2015년이 최악의 한 해였다"면서 "올해는 연초부터 만만치 않다. 동대문시장은 중국인들 때문에 호황이지만 우리처럼 지방 소매상과 거래하는 사람들은 (상황이) 많이 어려워졌다"고 토로했다.

[새해 희망을 여는 사람들] 동대문시장 청년상인 "동대문 시장은 청년 의류디자이너의 준비무대죠"
24시간 잠들지 않는 서울 동대문시장은 내수 침체로 주춤거리고 있지만 중국인들이 밀려오며 그나마 활기를 유지하고 있다. 지방으로 내려가기 위한 의류가 쌓여 있다. 사진=이진혁 수습기자


■끼니도 잊고 꿈 키우는 청춘 해방구

동대문시장은 의류 디자이너를 꿈꾸는 청년들의 해방구이기도 하다.

시장에서 만난 남성복 디자이너 이정광씨(28)와 팀원들도 그 중 하나. 이씨는 쇼핑몰 'Cre8'에서 남성복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학창시절부터 유독 패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결국 꿈을 이루기 위해 동대문시장을 휘젓고 다니고 있다. 이날도 그가 동대문을 찾은 것은 단추, 지퍼를 비롯한 의류 부자재나 원단 등을 찾아 발주하기 위해서다.

이씨는 "공장에다 바로 주문할 수도 있지만 원단 등의 제품 상태를 직접 확인하기 위해선 현장을 찾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면서 "밤마다 이 두 발로 열심히 뛰어다니고 있다"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청년 디자이너들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 홍대 인근에 있는 Cre8 사무실로 따라갔다.

"패션일을 하고 싶었지만 이와 무관하게 대학에 입학하고 나니 찾아오는 것은 방황밖에 없었다. 대학생활도 재미가 없었다. 옷 생각만 하다 자퇴를 결정하고 무작정 상경했다." 이씨의 말이다.

하지만 지난해는 가혹했다. '어땠느냐'는 말에 그와 팀원들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의류업이 경기에 특히 민감하다보니 더 그랬다.

이씨는 "요새는 경기가 안좋아 흔히 말하는 가성비(가격대비 성능)가 좋은 것들만 잘나간다"며 "그래서 막상 손에 쥐는 건 얼마 안된다"고 토로했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땐 패션업계의 화려함만 보였다. 하지만 정말 바쁘게 살아가는 곳이란 것을 (업계에 들어오고)알았다. 일하다 보면 밥도 못 챙겨먹을 때가 많다." 이씨와 함께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는 Cre8 박유민 대표(28)의 말이다.

박씨 역시 패션과 무관한 일본어를 전공했다. 하지만 여행으로 간 일본에서 인생이 바뀌었다. 도쿄의 패션 일번지로 불리는 하라주쿠에서 멋진 옷을 입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문득 자신이 그런 옷을 만드는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박씨는 "사실 워낙 힘든 업종이라 힘들다는 생각은 많이 하는데, 후회는 안한다. 내가 만든 옷이 고객들에게 인정받고, 꿈을 공유하는 친구들과 같이 일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이씨도 "(박 대표) 덕분에 하고 싶은 디자인을 할 수 있어 즐겁다"고 맞장구를 쳤다.

남들보다 한 철을 먼저 살아야 하는 의류패션계 종사자들. 남들은 모두 잠든 새벽시장을 누비며 원하는 원단 등을 찾아 옷을 디자인하고, 패션 트렌드를 놓치지 않기 위해 늘 탐색하고, 그러면서 직접 옷도 팔아야 하는 그야말로 숨막히는 하루하루의 연속이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지만 끼니를 거르는 일도 다반사다.

이씨와 박 대표만 해도 밤 10시부터 다음날 새벽 2시 새벽시장, 새벽 2~3시 상품확인 및 포장·배송, 아침 7~8시 온라인 쇼핑몰 점검, 9~12시 상품 촬영 및 온라인 등록, 점심, 오후 1~4시 상품 포장 및 배달, 4~5시 마감 및 매출확인·점검, 6~10시 저녁식사 및 취침 등 살인적 일정이 반복되고 있다.

박 대표는 "이제 막 시작한 회사라 목표를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쑥스럽다"면서 "쇼핑몰 의류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버티는 것'이다. 돈을 벌든 못 벌든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고 전했다.

이씨 역시 "돈을 못벌고 포기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잘 돼도 너무 힘들어 (사업을)접는 사람도 많다.
끝까지 버티는 것, 매출이 없어도, 성과가 없어도 버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버티는 것 하나는 자신 있다"며 활짝 웃었다.

아프니까 청춘이라지만 꿈과 희망이 있어 더욱 빛나는 청춘이다.

bada@fnnews.com 김승호 기자 김현 이진혁 수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