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증권시장의 불확실성이 고조되면서 전업투자자 세계도 총성 없는 생존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초저금리 시대에 예적금 수익률에 만족하지 않는 투자자들이 늘면서 전업 전향도 잇따르는 추세다. 그러나 수년간 지속된 박스피(박스권이 장기화된 코스피) 장세와 바람 잘 날 없는 대내외 이슈는 일부 전업투자자의 투자성향을 고정비 절감, 보수적인 포트폴리오 구성 등과 같이 방어적으로 바꾸고 있다. 본지가 이런 전업투자자를 밀착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피말리는 투자전쟁 현장을 24시 형태로 재구성해봤다.
오전 6시30분, 오늘도 치열한 하루를 예상하며 잠에서 깬다. 대충 빵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얼른 씻고 '작업장'으로 출근한다.
작업장은 자택이 있는 서울 도곡동과 가까운 소형 아파트. 몇년 전까지는 다른 전업투자자들처럼 나도 여의도로 출근해 정보를 교류했다. 하지만 박스권 장세가 길어지면서 장기간 수익률이 신통치 않았고, 비용절감을 위해 이곳으로 옮겼다. 직장인 친구와 월세를 나눠내면서 밤에는 친구가 잠을 자고, 친구가 출근하는 아침부터 낮 시간대는 내가 작업장으로 쓴다.
매일 아침 7시30분까지 출근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신문 보기다. 국내 유명 경제일간지 2개와 종합지 1개를 구독한다. 오전 8시부터는 증권사 리포트를 읽는다. 얼마 전 지인의 소개로 '제자'를 받았다. 이 일은 혼자서 공부할 것도 많지만, 그보다 정보가 어떤 경로로 흘러가는지, 수많은 장세 속에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경험적인 부분도 꽤 중요하다. 그래서 종종 '가르침'을 받겠다고 찾아오는 친구들이 적지 않다. 특히 요즘엔 취업이 워낙 힘들어선지 이런 친구들을 더 많이 본다.
전업투자자 도제 시스템이다. '무임금'이 불문율이다. 제자는 보통 오전 6시30분까지 출근해 청소, 간밤의 뉴스 및 조간 신문 스크랩, 공시 체크, 심부름까지 거의 모든 영역에서 내 수족처럼 생활한다. 계약서도 없고, 근무 기한도 없다. 본인이 원하는 만큼 있다가 네트워크 구축, 정보 습득, 트레이딩 방법 등을 '알아서' 배운 후 나간다.
단돈 20만원으로 시작해 25년간 전업 생활을 하면서 이제는 자산가 소리도 듣지만, 사실 돌이켜보면 경제 부흥기에 편승해 운이 좋았던 것 같다. 그래선지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는 시점에 이런 친구들을 보고 있으면 갑갑하고 안타깝다. 나는 내 아들에게는 절대 전업을 권하고 싶지 않다.
개장 30분 전인 오전 8시30분부터는 본격적인 '전시 준비 태세'에 돌입한다. 홈트레이딩시스템(HTS)에 접속하고, 증권 전문 TV방송을 켠다. 내 주식 철학을 되새기고, 마인드컨트롤도 한다. 주식 전업 투자는 한순간의 실수로 몇 년 혹은, 인생 전체가 우울해질 수 있다. 바짝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근 나는 투자전략을 많이 바꿨다. 예전에는 코스닥 소형주, 일명 잡주에 올인해 단타로 '먹고 빠졌다'면 이제는 대형주로 분산 투자해 몇 개월을 본다. 과거와 비교하면 나름 장기투자로 전환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같은 대세 하락장에서 무턱대고 덤볐다간 모든 것을 잃는다. 나이가 들면서 공포가 늘었고, 헷지(위험 회피)를 더 신경쓰게 된다.
조금 더 보태면 대세 업종인 바이오 말고는 중형주 이하 종목을 모두 처분해 대형주로 포트폴리오를 싹 갈아치웠다. 그래도 투자처를 찾지 못한 나머지 부동자금은 상장지수펀드(ETF)에 일단 넣었다. '한 방'을 노렸던 예전의 나였으면 "돈도 안 되는 거 뭐 할려고 투자하느냐"고 비웃을 일이다. 그만큼 시장이 불안하고, 투자할 곳이 없다는 얘기다.
며칠 전 만난 친한 증권사 지점장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고 했다. '지금은 먹는 장이 아니라 안 깨지고 버티는 장'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라고 했다.
오전 9시, 개장이다. 시초가와 종가가 하루를 결정한다. '주식쟁이'들의 전용 메신저에는 각종 '찌라시'가 해당 종목을 빨리 매수하라고 유혹한다. 특징주 뉴스도 수시로 올라 온다. '단타는 하지말자'는 게 원칙이지만 규모를 줄였을 뿐, 완전히 끊은 것은 아니다. 시황에 따라 경험적으로 데이트레이딩도 자주 한다.
정신없이 시황에 대응하다보면 어느새 점심 시간이다.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대부분 배달 음식을 먹는다. 수십억 판돈을 굴리는 사람이 배달 음식이라니…. 좀 처량하지만 어쩔 수 없다. 증시는 점심 시간이 따로 없으니까.
장 마감인 오후 3시부터는 종일 지친 눈의 힘을 푼다. 하지만 이제부터 진짜 정보수집 단계다. 다른 전업투자자들처럼 여의도 단체 생활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남들보다 좀 더 많이 움직여야 한다.
나 같은 전업투자자나 증권맨들과 공유하는 스터디 3개에 참가하고 있다. 3~5명으로 이뤄진 각 스터디에서는 종목 분석과 정보 교류가 이뤄진다. 이런 자리에서 빨대(출처)는 서로 묻지 않는 게 도의다. 각자가 알아서 판단하고, 정보의 신뢰성은 수익률로 말한다. 정보의 '날'이 무뎌진다 싶으면 즉시 스터디에서 퇴출되는 게 이 바닥이다.
스터디가 없는 날 오후에는 주로 상장사 탐방을 간다. 이때는 자문사 명함과 기자 명함 2종을 쓴다. 자문사 신분으로 갈 때는 근사한 외제차를 타고 가서 투자 의향을 내비치며 정보를 구하고, 기자로 갈 때는 낡은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타고 가서 취재를 한다.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정보 수집으로는 썩 괜찮다. 근데 요즘에는 금융당국이 미공개 정보에 대한 단속을 심하게 하면서 이마저도 녹록지 않다. 대형주, 분산 투자로 전략을 바꾼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
늦은 저녁 시간까지는 사람을 만난다. 상장사 관계자, 증권맨, 공무원, 정치인, 기자, 사업가, 전업투자자 등 모든 사람들을 영역 없이 사귄다. 시대가 바뀌어도 정보는 결국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공식은 변함 없다.
특별취재팀 조창원 팀장 김용훈 김경민 고민서 김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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