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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산책] 소피 칼 '캘리포니아 여행'.. 타인의 삶 들여다보기

[그림산책] 소피 칼 '캘리포니아 여행'.. 타인의 삶 들여다보기
소피 칼 '캘리포니아 여행'(2003년)

"1999년 6월 4일, 소피 칼씨께. 저는 미국에 사는 스물일곱 살 남성입니다. 최근에 오랫동안 지속해왔던 한 관계를 끝내야 했습니다. 실연 이후의 감정과 느낌을 추스르면서 일상을 힘겹게 헤쳐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파리에 있는 당신의 침대에서 나의 애도를 기억하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편지를 보낸 남자는 미국에 거주하는 조시 그린이라는 작가다. 소피 칼에게 자신이 이별을 애도하는 기간에 침대를 빌려달라고 e메일을 보냈고, 한 달 후 소피 칼로부터 침대 프레임과 매트리스, 이불, 베개 등을 받았다. 조시 그린은 6개월간 소피 칼의 침대에서 자고 생활하면서 본인의 느낌과 감정을 소피에게 e메일로 보냈다. 두 작가의 만남은 두 편의 작품을 탄생시켰다. 한 작품은 소피 칼의 '캘리포니아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조시 그린의 '소피 칼의 침대'다. 1954년 파리에서 출생한 소피 칼은 1980년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한 '잠자는 사람들'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스물일곱 살이었던 그녀는 친구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 등 총 27명에게 본인의 침대에서 잠을 잘 것을 부탁했고, 9일 동안 27명이 돌아가면서 본인의 침대에서 잠을 자는 모습을 사진과 글로 기록했다. 1999년 당시 스물일곱 살인 조시 그린의 작업은 1980년 당시 스물일곱 살이었던 소피 칼의 침대 작업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이자 변형인 것이다.


소피 칼은 우리가 겪는 매우 일상적이고 소소한 삶에 일정한 규칙을 두고 개입하며 작품을 연출한다. 그녀는 사진과 글을 통해 이러한 일이 있었노라고 증거물을 제시하지만 그 내용들 속에는 작가에 의해 연출된 사실과 그 연출을 배반하는 돌발상황이 섞여 있다. 살면서 타인이 나의 삶에, 또는 내가 타인의 삶에 개입하게 되는 것처럼, 자신 만의 공간으로 타인을 끌어들이고 이를 통해 연결된 타인의 생활과 감정까지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 소피 칼이 이루는 현실에서의 마법이다.

류정화 아라리오뮤지엄 부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