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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산책] 개빈 터크 '또 한 명의 부랑자'

허름한 옷을 빌려입은 명성

[그림산책] 개빈 터크 '또 한 명의 부랑자'
개빈 터크 '또 한 명의 부랑자'(1999년)

1997년 로열아카데미에서 그 이름도 유명한 '센세이션'전의 프라이빗 뷰가 열렸다. 작가와 미술계 인사 등 특별초청자를 위한 비공개 오프닝 파티에서 개빈 터크(49)는 노숙자 행색과 낡아빠진 의상, 스튜디오에서 종이로 대충 만든 신발을 신고 파티에 나타났다. 그는 말했다. "다들 파티를 위해 한껏 차려입고 오겠지만 나는 그런 옷이 없고 차라리 내가 직접 만들기로 결심했다."

거리에서 부랑자를 보는 일반적인 시선과 미술계의 중요한 자리에 부랑자가 나타났을 때 주변인들의 반응은 크게 달랐을 것이다. 터크를 모르는 이들에게는 파티의 분위기를 깨는 난입자였을 테지만, 터크를 아는 이들에게는 재미있는 오프닝을 위한 다소 파격적인 퍼포먼스였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미술계의 파티였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명망 있는 이들에게 밀려 '그 세계'에 서있지 못하고 존재감을 상실한 작가의 모습, 그 자체였을 수도 있다.

작가는 당시의 경험을 살려 부랑자로 분한 늙은 자신의 모습을 조각으로 재현했다. 다리를 벌리고 서서 방아쇠를 당기는 듯한 포즈는 앤디 워홀의 실크스크린 작품에 등장하는 팝스타 엘비스 프레슬리의 자세에서 참조한 것이다. '센세이션'전에 출품했던 '팝'에서도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를 부르는 섹스 피스톨스의 멤버인 시드 비셔스가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자세를 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부랑자' 시리즈는 '팝'의 거리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화려한 팝스타는 유명한 미술가에게서 차용한 작품의 이미지를 통해 다른 유명인의 모습으로, 부랑자로, 혹은 작가 자신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차용미술이라는 현대미술의 장치를 사용한 그의 작품은 유명인과 유명 작가, 유명 작품의 명성과 지위가 예술에 부여하는 영향에 대한 연구이기도 하다.

작가가 차용한 것은 단지 이미지가 아니라 작품을 구성하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요소, 명성에 대한 차용이 확실하다.

류정화 아라리오뮤지엄 부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