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악 인생 60년' 정재국 국립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
정악은 '느림의 예술' 궁중음악의 웅장함·무게감 담아
100년 간 원형만 유지해 감상하기엔 지루한 면 있어
정통 훼손하지 않으면서 산뜻한 느낌으로 바꿔야되는데..
누가 하겠나, 60년 정악만 파온 내가 새로운 길 터야지
60년 넘게 정악(正樂)의 길을 걸어온 정재국 국립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은 "음악은 곧 수양(修養)"이라며 "정악의 정신은 고고한 선비정신과 앨맥상통한다"고 말했다. 사진=김범석 기자
"사람들이 들어주지 않으면 음악은 의미가 없어. 시대에 맞게 바꿔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민속악은 많이 연주하고 많이 듣는 반면 정악(正樂)은 뭔지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잖아요. 정악의 정통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재미있다, 산뜻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변화를 준 겁니다."
60년 넘게 정악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 새 길을 모색한 이유는 결국 계속 그 길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정악의 정통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자 최근 정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정재국 국립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73) 얘기다. 중요무형문화재 46호 피리 정악 및 대취타 보유자인 그는 "관객이 들어주지 않는 음악은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단지 전통의 보전으로서 대한제국 이후 100여년간 원형만 유지해온 정악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게 된 이유다.
정악은 민속악과 함께 국악의 큰 줄기를 이룬다. 판소리, 민요 등 민속악은 당시의 대중음악으로 민중들이 즐겼지만 정악은 주로 궁중의 연례나 제례 등 의식음악으로 쓰여 쉽게 접하기 어려운 음악이었다. '고상하고 바른음악'이라는 이름에서 보듯 느리고 절제된 탓에 현대에 와서도 감상용으로 지루한 면이 있다.
그러나 지난달 25~26일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정악, 새로움을 더하다'라는 제목으로 열린 무대는 달랐다. 정악이 기능적 목적을 넘어 현대 관객과 공감할 수 있는 예술음악으로 재탄생했다. 피리 소리가 지배하던 합주곡은 악기 편성을 바꿔 소리의 균형을 맞췄고 현악기와 타악기의 비중을 높여 현대적인 합주 음악으로 탈바꿈했다. 양금, 생황, 향비파 등 전승이 끊길 위기에 처한 선율 악기도 도입해 조화로운 음색을 만들어냈다.
정 감독은 이 공연에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격인 집박(執拍)으로 나섰다. 기존의 집박이 박을 쳐서 음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정도에 그쳤다면 정 감독은 장구 연주까지 더해 60명 규모의 정악단을 힘있게 이끌었다. 오는 5월 퇴임을 앞둔 예술감독으로서 마지막 무대이자 정악의 미래를 그린 청사진이었다.
지난 7일 서울 서초동 국립국악원에서 만난 정 감독은 "100년 동안 근근이 명맥만 이어오며 정악의 원형을 보존하는 것이 첫째였다면 이제는 예술음악화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현대 관객이 즐길 수 있는 음악으로 바꿔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감히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할 일이었다. 떠나는 마당에 그가 굳이 일을 벌인 이유다. 정 감독은 "처음 제안했을 때 반대하는 단원들도 꽤 있었다. 새로운 시도가 불안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내가 남들이 인정하는 인간문화재이고 정악을 가장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나설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명실공히 정악의 정통성을 대표하는 국악인이다. 1966년 국립국악원에 입단해 1998~200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로 재직한 10년을 제외하고 국립국악원 소속이었으니 인생 전부를 이곳에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악단 예술감독도 1996~1998년에 이어 두번째 맡고 있다. 그는 "한 우물만 파다보니 실력이 쌓이고 경력이 쌓이고 명예를 얻게 됐다"고 했다. "퇴임을 앞둔 지금 아주 행복하다"는 목소리에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꿈만 같다. 그를 국악으로 이끈 건 가난이었다. 전쟁과 광복을 거치며 일찍 부모를 여읜 삼남매는 친척집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정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돈화문을 지나는데 국악사양성소(현 국립국악고등학교)에서 국비 장학생을 모집하는 공고문을 봤다. 모든 학비 일체 지원에 매달 생활비도 준다는 말에 국악이 뭔지도 모르고 시험을 봤다. 필기시험도 봤지만 실기시험을 잘 봐서 합격했던 것 같다. 다들 동요를 부르는데 이탈리아 가곡 '산타루치아'를 불렀다. 그래야 튈 것 같았다.
―왜 피리였나.
▲선생님이 세면장에서 피리 연습곡을 부시면 그 소리가 교실까지 들렸다. 소리가 크고 강약이 춤추니 마음이 움직였다. 어린 나이에 고생한 나를 위로하는 것 같았다. 희로애락의 감정 표현이 자유자재로 드러나는 피리에 매료됐다.
―무엇을 배웠나.
▲정악 뿐만 아니라 민속악, 무용, 성악, 판소리 등 거의 모든 전통예술 장르를 섭렵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정악만 해야 했다. 우리는 그러라고 뽑힌 학생들이었다. 정악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돈벌이가 되는 민속악에 쏠렸기 때문이다. 이론도 열심히 배웠다. 선생님이 실기만 해서는 잘못하다간 '딴따라'가 된다고 했다.
―정악의 매력은.
▲느림의 예술이다. 궁중음악의 화려함, 웅장함, 무게감이 있다. 정악을 하는 사람의 정신도 음악을 따라간다.
국악사양성소를 졸업하고 1966년 국립국악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다. 그는 졸업 직후인 1962년 서울대 국악과에 합격해 놓고 돌연 미국행을 택했다. 더 큰 세상에 나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5·16장학회(현 정수장학회)가 미국으로 파견한 민속예술단의 단원으로 6개월간 미국 서부 순회공연을 했다. 현지 반응은 뜨거웠다. UCLA에서 연주한 뒤 종족음악학과에 강사로 와 달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뻔 했었죠. 당시 한국은 살기 어려웠으니까 마음이 동했지. 남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저도 몰래 숨어볼까 했는데 강제 소환령이 내려왔죠. 하하."
귀국 직후 군입대는 그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군악병이 된 그는 사회자 정주일(예명 이주일)과 대금주자 이생강을 만나 환상의 트리오를 이룬다. 정주일과 이생강은 각각 훗날 한국 코미디계의 거성, 민속악의 대가가 된다. "정주일이 '피리의 왕자들'을 소개하면 이생강 선생과 내가 뛰어나와 듀엣으로 연주했어요. 팝송, 가요 가리지 않고 불 수 있는 건 다 불었어."
제대 후 들어간 국립국악원에서 그는 순식간에 정악단의 중심이 된다. 오케스트라로 치면 제1바이올린에 해당하는 '목(目)피리'에 그만한 재목이 없었다. 그의 스승, 피리의 귀재였던 김준현 명인은 45세라는 젊은 나이에 타계했다. "그 바람에 한 세대를 뛰어넘고 20대에 덜컥 악단의 리더가 됐어요. 일제강점기 정악의 맥을 이어온 '이왕직 아악부' 출신 스승들과 함께 연주를 한 거지. 그때부터 32년간 정악단을 이끌며 선생님들의 음악 정신을 이어왔어요."
―어린 나이에 리더 자리가 부담스럽지 않았나.
▲피리가 워낙 중요한 자리이다 보니까 선생님들이 많이 키워주셨다. 국악사는 전부 비정규직이었는데 입단 1년만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정규직 국악사가 됐다. 쉽게 자리가 나지 않았던 터라 경쟁이 치열했다. 내 위치를 탄탄하게 닦아가고 싶었다.
―야망이 있었던 것 같다.
▲실기인은 (자신의 비법을 전수하지 않는) '청기와쟁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후진들에게 내가 터득한 것을 전수하는 것이 중요해졌지만 당시엔 남들이 범접할 수 없는 1인자가 되는 게 먼저였다. 음악적으로 빨리 출세한 편이다.
정악은 기본적으로 합주 음악이기 때문에 연주자 한 사람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어렵다. 정악으로 입신양명하기는 더욱 어렵다. 하지만 그는 1972년 피리 연주자로서 처음 자신의 이름을 건 '정재국류(流) 피리산조'를 만들고 우리나라 최초의 피리독주회를 열며 주목받았다.
"민속악에는 산조(기악독주곡)가 활성화돼 있었지만 정악은 아니었어요. 창작곡도 없었죠. 김기수, 김용진, 서우석, 황병기, 이상규 선생님 등 창작국악의 대가들에게 작곡을 의뢰했어요. 다양한 피리 음악을 무대에서 펼쳐놨지." 이후 꾸준히 독주회를 개최하며 피리음악의 외연을 넓히고 활성화했다. 그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업적 중 하나다.
1993년에는 독보적인 실력을 인정받아 50세라는 젊은 나이에 피리정악과 대취타라는 별개의 분야를 아우르는 인간문화재로 지정받기에 이른다. 그는 "40대부터 인간문화재로 거론됐는데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의견이 많아 성사되지 못했다"며 웃었다.
한예종 교수 재직 당시 피리를 개량해 고급화·다양화한 것도 높이 평가받는다. 두 옥타브 정도밖에 소화하지 못하는 피리의 음역대를 넓힌 향피리, 저음을 극대화한 대피리를 만들어 창작음악에서의 활용도를 높였다. 외형과 색깔을 세련되게 바꾸는 데도 신경썼다.
그가 가장 뿌듯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많은 후진들을 양성한 것이다. 무형문화재로서 가르친 전수생, 교수로서 가르친 학생을 모두 합해 180명에 달한다. 그가 처음 정악을 시작할 때만해도 정악 연주자를 통틀어 10명이 채 안됐다. "한국 땅에서 피리 좀 분다하는 연주자들은 거의 다 내 제자들이에요. 10년간 교수직을 하면서 가르친 학생도 40명이 넘는데 그 중에 30명이 현재 활약하고 있지."
가르칠 때 가장 강조하는 것은 인간성이다. 사람이 먼저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정악 정신은 고고한 선비 정신과 같습니다. 음악이 곧 수양(修養)이지. 합주 음악이라 튀어서도 안돼요. 조화를 이뤄야죠."
"전통을 지키되 시대와 호흡하라"는 것이 그 다음이다. 졸업할 때 학생들이 무조건 창작곡 한곡씩 내게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예술감독직은 곧 끝나지만 전수, 연주회 등을 통해 그의 예술은 이어진다. 보통 피리 연주자는 50세가 되면 수명이 다 한다고 하는데 그는 "신기하리만치 호흡이 여유롭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피리정악을 이렇게 오래 연주하는 사람이 없다더라고요. 이상하게 부는 힘이 좋고 손가락도 잘 돌아가. 하하. 비결이라봐야 매일 헬스장에 가는 것, 일주일에 한번 등산 가는 정도."
마지막으로 그에게 국악의 미래를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그는 국악의 발전에 대한 오해를 지적했다. '퓨전'이라는 미명 아래 국악의 본질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 "서양음악화 되는 것을 국악의 발전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크로스오버도 우리 음악의 원리를 지키며 다른 것과 만나야 의미가 있는 거에요. 악기만 국악기를 사용한다고 국악이 아니거든. 모든 음악적 재료를 우리 것으로 활용해야 진짜 국악인 거에요."
dalee@fnnews.com 이다해 기자
*정악(正樂)은 과거 궁중음악의 일부를 포함해 조선시대 상류층에서 연주되어 오던 음악으로, 판소리·민요·잡가 등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음악을 통칭하는 '민속악'과 대칭된다. 거문고, 가야금 등 줄로 된 현악기가 중심이 되며 여기에 피리, 비파, 양금, 생황, 대금 등을 곁들여 합주하는 형식을 취한다.
정재국 명인 프로필
△75세 △1942년 충청북도 진천 출생 △1956~1962년 국립국악원부설국악사양성소(현 국립국악고) △1966~1995년 국립국악원 국악사연주원 및 악장 △1972년 한국 최초 피리독주회 '정재국류 피리산조' 개최 △1989년 문화포장 △199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6호 피리정악 및 대취타 보유자 지정 △1996~1998년 국립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 △1998~2007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음악과 교수 △2006~2007년 제3대 한국예술종학학교 전통예술원 원장 △2008년 국립국악원 원로사범 △2008년 보관문화훈장 △2011년 제18회 방일영국악상 △2011년~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2014년~현재 국립국악원 정악단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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