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드러나는 시간적 진행을 시각화하는 정상화 화백(84)은 한국 단색화의 대표주자다. 프랑스 생 테티엔 미술관장이자 저명한 미술사학자인 로랑 헤기는 "그의 단색의 화폭은 자연스러움, 정지된 고요함, 그리고 감정을 배제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표현"이라고 말했다. '무제 87-7-A'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무수한 사각형의 형태는 안료를 바르고 다시 떼어내고 또 바르는 연속적인 작업의 흔적이자 정상화 작품의 요체이다. 선명한 푸른 색은 그가 청소년기를 보낸 곳이 항구도시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정상화 화백은 안료를 통해 흔적을 남기는 표현의 행위 이전에 화면 그 자체를 사유의 공간으로 두고 있다"고 말했다. 즉 비어 있는 벽면을 향해 정좌하고는 묵상 삼매에 빠져드는 선정이나 자신의 존재를 탈각하고 오로지 무명성, 익명성으로 남기 위한 치열한 수신의 경지에 이른 도가(道家)의 방법을 연상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꽉 차있지만 동시에 비어 있는 그의 화면은 그 존재 자체로도 충분히 함축적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중립적이고 무관심하며, 자연스러운 단순함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나 동시에 은유적이고 침묵적이기에 우리를 내면의 중심에 도달하게끔 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감상자로서 작가가 그렇게 스스로가 느끼고 경험해 내면화시킨 인생 경험과 창작과정에서 얻은 총체적인 자기 발견을 작품을 통해 느끼고 있는 것이다.
변지애 K옥션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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