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작가 레슬리 드 차베즈(38)의 조각설치 작품 '야수의 복부 아래서'에는 십자 형상의 자세를 한 남자가 등장한다. 두 팔은 양쪽에 놓인 고해성사대의 상판에 올리고, 다리를 묶은 쇠사슬은 천장에 매달렸다. 남자의 뒷모습 아래로 무릎을 구부려 시선을 내리자, 빈민가의 가옥들로 뒤덮인 남자의 팔과 가슴, 다리가 보인다.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판자로 만든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이어지고, 초라한 집들 사이로 맥도날드, 코카콜라 등의 기업 광고와 선전 문구가 보이는 이곳은 필리핀 수도의 외곽에서 보았을 법한 빈민가를 반영한 것이다.
필리핀은 천혜의 자연환경과 역사를 갖고도 스페인과 미국의 식민지를 차례로 겪으면서 허약한 민주주의와 만연한 범죄, 빈곤이라는 오래된 문제를 갖고 있다. 레슬리 드 차베즈는 검은 밑색으로 칠한 캔버스 위에 세밀하게 올린 어둡고 강렬한 이미지로 필리핀의 사회, 정치, 경제의 그늘과 부조리를 묘사해왔다. 본 작품의 남자 또한 필리핀의 부조리한 현실을 반영한다.
필리핀의 새로운 대통령, 두테르테의 '겁없는 자의 정치 드라마'가 이슈다. 그는 앞으로 6년 동안 필리핀의 운명을 주도하게 된다. 그동안 기존 정치 엘리트들에게 희망을 걸었던 국민은 법과 행정의 테두리를 벗어나더라도 가장 효과가 빠르고 확실한 변화를 이루기 위한 패에 판돈을 건 것이다. 그러므로 '두테르테 현상'은 기존 정치에 대한 절망의 반영일 뿐만 아니라 판타지 드라마를 꿈꾸는 이들의 상상력의 반영이기도 하다. 하지만 판타지가 현실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힘은 어디까지일까.
작품 속 남자는 고개를 떨구었다. 관람자들은 그의 초점을 잃은 눈과 마주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놓인 남자. 이 상황을 돋우는 것은 그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만 있는 외부의 시선인지도 모르겠다. 배 아래의 현실을 목도하고 쇠사슬을 끊고 거짓 고백의 판타지를 걷어내는 과정은 천천히 진행될 것이다. 현실의 변화는 생각보다 느닷없이, 하지만 천천히 찾아온다.
류정화 아라리오뮤지엄 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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