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모양의 헬멧을 쓴 남자의 목덜미 아래로 화려한 색의 꽃이 쏟아진다. 사방으로 뚫린 창으로 보이는 남자의 눈은 뒤통수에도 달렸다. 그는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에코 누그로호(39)는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주목받는 스타 작가임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인정받으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다. 에코 누그로호가 미술계에 입문한 시기는 정치사회적으로 격변의 시기였다. 그가 인도네시아 미술대학교를 다니던 시절 30여년간 인도네시아를 지배했던 강력한 수하르토 독재정권을 마침내 몰아낸 혁명을 경험한 것이다. 에코 누그로호가 나고 자란 족자카르타는 예전부터 전문적인 미술학교를 중심으로 아티스트 빌리지가 형성돼 있어 인도네시아 미술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 중 하나였다. 족자카르타는 혁명을 통해 독재를 몰락시키고 난 후 민주주의의 토양 아래 새로운 정치와 사회를 건설하자는 예술가들의 열망으로 가득했다. 에코 누그로호의 작품은 이런 족자카르타의 열망의 거리 위에서 시작됐다. 그의 시그니처가 된 검고 간명한 선과 화려한 색, 바틱(Batik·인도네시아의 전통 수공예 직물 염색법)에서 영감을 얻은 세밀한 패턴으로 이뤄진 벽화와 페인팅, 자수 그리고 만화의 주인공 같은 인물 조각 등은 모두 족자카르타를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 현대미술의 특징과 연결된다.
에코 누그로호가 만든 인물들은 모두 후드나 헬멧, 마스크 등을 쓰고 있다. 눈만 보이고 나머지는 모두 가린 위장도구들은 이슬람의 히잡을 연상케 하는 동시에 인물들이 갖고 있는 각자의 정체성을 숨기고 다른 정체성을 암시하는 역할을 한다. 독재정권 시기의 억압적 사회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면서 한편으로 그 시기를 견디기 위해 스스로 체화한 방식일 수도 있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대부분 정치적·사회적으로 냉소적 메시지를 내포하지만 실제 그의 작품들은 경쾌하고 발랄하며 관객과 부담없이 소통할 수 있다. 작가는 어렵게 얻은 자유의 기회를 작품을 통해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예술작품을 다른 이들과 공유하고 함께 믿음을 구축하는 일이 작가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이다. 비단 예술만이겠는가.
류정화 아라리오뮤지엄 부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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