옅은 채색과 담담한 필선으로 당나라 시인 이섭과 이태백의 시제를 화폭에 구현한 겸재 정선(1676~1759)의 작품이다. 한 점은 당나라 시인 이섭의 시 '제학림사승사(題鶴林寺僧舍·학림사 요사에서 짓다)'를 그려낸 작품으로 절간을 찾은 고사의 모습을 표현했다. 중은 반가운 손님을 향해 안채로 안내하는 손짓을 취하고 고사는 데리고 온 시동과 막 발걸음을 옮기려는 모습인데, 늦은 봄 적막한 산골 오후에 오랜만에 들리는 인물들의 두런거림으로 생기가 도는 모습이다.
또 다른 한 점 역시 당나라 시인 이백의 시제를 동정추월(洞庭秋月)의 구성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둥근 보름달 아래 배 타고 흥취를 즐기는 인물들의 묘사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특히 시구에 걸맞게 취기가 올라 이슬에 젖는 줄 모르는 두 인물과 멀리 날아가는 기러기, 산등성이 위로 빼꼼 얼굴을 내민 보름달의 표현에 있어 필선을 간소화하고 채색을 극도로 배제해 짙어가는 가을 강가의 아련함을 더해주는 모습이다.
작품은 한 수장가가 수집한 이래 3대에 걸쳐 보관하던 중 공개된 것으로 작품 곳곳에서 우리나라의 대수장가이자 서예가였던 인물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소전 손재형(1903~1981)의 인기가 적힌 상자, 그리고 작품 우측 하단에 찍힌 송은 이병직(1896~1973)의 소장인이 그것이다. 작품은 마치 대련처럼 소담한 상자에 두 틀이 들어가 전해졌으며 30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매우 소중히 보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채색과 필치에서 드러나는 내공뿐 아니라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높은 수준의 화격 또한 조선의 화성(畵聖) 겸재 정선이기에 가능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작품이다.
음정우 서울옥션 고미술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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