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로트렉'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작가 손상기(1949~1988)는 39세의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극심한 가난과 척추만곡증이라는 신체 장애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작업에 매달려 1500점에 달하는 드로잉과 유화 작품을 남겼다. 1979년 서울로 상경한 그는 도시 하층민들의 처절한 삶을 목격하고, 당시 민중미술 편에 선 작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사회 비판의식에 눈뜨게 된다. 그의 작품의 주된 소재는 난지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나 달동네 빈민들의 고달픈 삶 등 도시의 삶과 연관된 것들이 많았다. 이는 자신의 실제 삶과 일치하며, 그가 늘 부여안고 있던 감정의 울림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른 봄-호외'라는 제목이 붙여진 이 작품에서 마치 거대한 성벽이 서있는 듯한 골목길과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높은 담벼락은 이른 아침의 볕을 받아 오른편은 밝은 한편, 왼편의 벽과 두 담벼락 사이로 난 좁은 골목길은 아직 어두운 그림자에 덮여 있다.
냉기가 돌 정도로 을씨년스럽기만 한 이 외진 골목을 빠져나가듯 달려나가며 '호외'를 외치는 한 남자의 뒷모습은 어딘가 공허하면서도 불안하다. 특별히 의지할 곳이 없는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에 시선이 맞춰져 있던 손상기는 이 작품에서 약간 낮은 곳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시선으로 대상을 그렸는데, 이는 화면 전체에 약간의 긴장과 함께 무언의 심적 부담감을 느끼도록 한다.
화면에 잠복돼 있는 이유 모를 불편함, 그리고 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이른, 오히려 겨울의 끝자락에 가까운 시점에서 그가 만난 호외란 무엇일까. 손상기는 1985년 폐울혈성 심부전증 진단을 받은 후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1988년 2월 생을 마감하기까지, 병상에서도 자신이 마주했던 고독하고 피폐했던 삶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그려냈다. 그가 세상을 등지기 바로 직전 해에 그려진 이 작품에서 골목 끝자락에 살짝 드리운 밝은 빛은 자신의 어두운 삶을 끝내고 다른 세계로의 시작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지.
김현경 서울옥션 스페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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