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저·문화 >

열차 대신 추억이 정차한,간이역

한국관광공사 추천 12월 여행지는 '간이역'
80년 가까운 세월 묻은 경기 양평 구둔역
주름깊은 은행나무 한그루, 역 앞 서성이는 개 한마리
그게 다이지만.. 그래서 더 찾게되는..
시간이 멈춰 선 군산 임피역
일제시대 쌀 반출 거점이던 아픔 남아 더 찾아볼만
서양 간이역과 日가옥양식 결합, 독특한 외양에 등록문화재 지정

열차 대신 추억이 정차한,간이역
경암동 철길마을

간이역에는 열차 대신 추억이 정차한다. 역무원도 없고, 열차도 서지 않는 간이역을 애써 찾는 것은 기차에 얽힌 옛 추억들이 빈자리를 채워주기 때문이다. 간이역 앞 광장에 우뚝선 나무와 빈 대합실, 한가로운 철로에는 곡식과 석탄을 실어 나르던 이 땅의 역사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통학하던 유년시절의 추억, 기차를 타고 오가던 수많은 이들의 삶의 기억을 빛바랜 사진처럼 아련하게 불러온다. 한국관광공사는 '간이역 여행'을 테마로 이달에 가볼 만한 곳을 선정·발표했다.

■녹슨 철길에 첫사랑이 내려앉다, 양평 구둔역
열차 대신 추억이 정차한,간이역
구둔역 역사 전경


경기 양평군 지평면 일신리에 있는 구둔역은 80년 가까운 세월이 묻어나는 곳이다. 퇴역한 노병처럼 주름 깊은 은행나무 한 그루, 엔진이 식은 기관차와 객차 한 량, 역 앞을 서성이는 개 한 마리가 구둔역의 친구다. 구둔역은 간이역의 흔적과 폐역 명패를 달고 벌판에 섰다. 1940년 문을 연 이곳은 청량리-원주 간 중앙선 복선화 사업으로 종전 노선이 변경되면서 2012년 폐역의 수순을 밟았다. 구둔역의 빛바랜 역사와 광장, 철로, 승강장은 등록문화재 296호로 지정됐다.

삐걱거리는 대합실 문을 열고 들어가 승강장과 철길을 서성이는 모든 동선이 근대 문화를 더듬는 행위와 연결된다. 구둔역은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애틋한 첫사랑의 배경이 되며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끌었다. 12월이면 구둔마을 주민들이 마련한 카페, 체험장 등도 문을 연다.

■탄광 도시의 옛 모습을 만난다, 태백 철암역

강원 태백 철암은 정부가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을 펴기 전까지 번성한 고장으로, 한때 인구가 5만여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철암의 모습을 짐작해볼 수 있는 곳이 철암역이다. 석탄으로 번성하던 시절을 웅변하듯 4층 건물이 우뚝 섰다. 철암역은 역사보다 그 옆에 자리한 선탄장이 유명한데,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이곳에서 촬영하기도 했다. 선탄장 건너편에 자리한 마을 풍경도 독특하다. 곧 쓰러질 듯한 2~3층 건물이 당시 모습 그대로다. 지금은 철암탄광역사촌으로 재단장해 박물관이며 전시장으로 사용된다.

태백은 겨울 가족 여행지로도 좋다. 국내 석탄산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태백석탄박물관, 고생대 삼엽충과 공룡 화석을 전시하는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 자연의 신비를 간직한 용연동굴, 한강의 발원지 검룡소,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연못, 드라마 '태양의 후예' 세트장 등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100년 넘은 급수탑이 우뚝 서있는 논산 연산역

간이역을 찾아가는 여행은 느림을 즐기는 여정이다. 호남선 연산역은 대전과 충남 논산 사이에 있는 간이역이다. 상하행을 더해 기차가 하루에 10회 정차한다. 그나마 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덕분에 연산역의 시간은 자연의 속도에 맞춰 느긋하게 흐른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급수탑이 있다. 화강석을 원기둥처럼 쌓아 올리고 철제 물탱크를 얹었는데,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48호로 지정됐다. 연산역에서는 다양한 철도 문화 체험도 가능해 주중에는 유치원 아이들이, 주말에는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이 찾는다. 쓸쓸한 간이역이 활기 넘치는 시간이다.

연산역에서 가까운 논산 돈암서원, 질 좋은 농축산물을 거래하는 화지중앙시장, 은진미륵의 미소가 좋은 관촉사, 과학적이고 기능적인 한옥을 볼 수 있는 논산 명재고택, 젓갈과 근대건축이 어우러진 강경근대문화코스까지 논산의 속살을 찬찬히 들여다보려면 하루 나들이로도 벅차다.

■시간이 문득 멈춰 선 곳, 군산 임피역
열차 대신 추억이 정차한,간이역


전북 군산 임피역(큰 사진)은 1924년 군산선 간이역으로 문을 열어 호남평야에서 수확한 쌀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거점 역할을 했던 아픈 기억이 있는 곳이다. 1936년에는 보통역으로 승격하고, 역사도 새롭게 지어졌다. 지금의 역사는 이때 지은 것으로, 서양 간이역과 일본 가옥 양식을 결합한 독특한 외양이 역사적.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재 208호로 지정됐다.

2008년 5월 여객 운송이 완전히 중단됐고, 임피역은 지금 말끔한 모습으로 단장해 관광객을 맞는다.
군산 출신 소설가 채만식의 대표작 '탁류'와 '레디메이드 인생' 등을 모티프로 한 조형물이 들어서고, 객차를 활용한 전시관도 생겼다. 승강장 쪽에 나무 벤치를 마련해 고즈넉한 간이역 풍경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 개항장 군산의 독특한 분위기가 풍기는 근대역사문화거리, 군산 시민의 휴식처로 사랑받는 은파호수공원, 신선한 해산물을 구입하고 맛볼 수 있는 비응항 등을 함께 여행할 수 있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