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은 축제, 힘겨운 시절 더 사랑합시다"
"묵묵히 하루를 사는 여러분이 영웅입니다"
"설 다음날이 생일, 세뱃돈 두둑했죠"
"이소룡 흉내내려고 쌍절곤을 샀는데 동네형들에게 뺏겨 며칠을 울었어요"
"무대에선 안중근 역할 하고 있지만 영웅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잖아요"
"그들 덕분에 사회가 유지되는 거겠죠"
한겨울 중에서도 가장 춥다는 대한(大寒)의 강추위와 새벽부터 쏟아진 폭설. 어지간하면 누군가를 만나러 나가기 싫은 추위와 미끄러운 길을 뚫고 뮤지컬 배우 정성화(43)를 만났다.
개그맨에서 배우로, 다시 뮤지컬 스타로. 마침내 전성기를 맞은 그다. 도통 쉴 틈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최근 몇 년간 뮤지컬 무대를 종횡무진 누빈 그는 이제 강력한 티켓 파워를 자랑하는 명실공히 '국내 대표 뮤지컬 배우'가 됐다.
설 연휴를 앞두고 서울 신사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만난 그는 한복 차림이었다. 뮤지컬 '영웅'이 이제 막 막을 올린 데다 최근 열린 제1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터라 각종 스케줄로 피곤할 듯도 했지만 한복 저고리 색상만큼이나 얼굴 표정은 환했다.
"명절 앞두고 한복 촬영은 꼭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하하."
한복은 딸아이 돌잔치 이후 처음 입는다는 정성화는 사진 촬영 내내 들떠 있는 모습이었다.
"방송이나 신문에 등장하는 한복 입고 절하는 모습은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서야 가능한 것 아니냐"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호쾌하게 웃는 그의 모습은 지켜보는 이도 웃음짓게 했다.
"어렸을 때 설날은 마치 축제 같은 날이었다. 맛있는 음식은 물론이고 장난감이나 내가 갖고 싶었던 것들을 살 수 있게 하는 자금이 조달되는 날이지 않나."
설날 받은 세뱃돈으로 무슨 장난감을 살까 궁리하던 개구쟁이 어린아이는 어느덧 어른으로 자라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됐지만, 축제와 같았던 설날을 기다리는 마음은 여전한 듯했다. "그래도 올해는 출연 일정을 잘 받아서 설 당일과 그 다음날 이틀 쉴 수 있다"며 크게 웃는 걸 보니 말이다.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정성화의 추억 속의 설날 그리고 지금 현재 그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설 하면 생각나는 것은.
▲내 생일이죠. 구정 다음날이 생일이다. 설날에 친척들 만나서 떡국 먹고, 세뱃돈 받고 그런 좋은 날이 하루 연장이다. 축제와 같았다. 생일날이 되면 각종 차례 음식에 케익이 올라간다. 너무 설레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새 장난감을 살 수 있던 게 가장 컸다. 그렇지 않나? 설날 세뱃돈으로 위시리스트를 이룰 수 있다는 그 설레임 말이다. 그래서 더 정성스럽게 세배하고 그랬었다.
―명절과 생일이 겹치면 생일 챙기기 힘든데.
▲어머니가 차례 음식 하면서도 미역국은 잊지 않고 챙겨주셨다. 나름 귀한 아들이었나 보다. 하하.
―설에 즐겨 먹는 음식은.
▲탕국이다. 희한하죠. 나는 그게 참 좋더라.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다. 그 안에 들어간 두부와 고기, 다시마랑 국물이 절묘하게 조화가 되면서 밥 말아 먹어도 좋고, 해장도 잘 되고. 입맛이 좀 올드하다. 아마 생일이 그때라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설에 뭘 하고 놀았나.
▲설 하면 뭐니뭐니 해도 윷놀이 아니냐. 가족별로 윷놀이를 했는데 그게 너무 재미 있었다. 지금도 세상에 윷놀이만큼 재미있는 게 없는 것 같다. (지금도 하나?) 그렇지. 큰아버지가 '어떻게든 가족들이 웃고 갈 수 있게 놀아보자'는 생각이 확고하다. 빨리 떡국을 먹고 윷놀이 한 판 하고 헤어지자 뭐 그런 식이다. 가족 당 만원씩 걸고 소박하게~. 몇 가지 규칙을 더하면 더 재밌다. 예를 들면 '멍청도' 같은 거. (멍청도?) '빽도'랑 비슷한 건데, 윷과 모가 줄줄이 나와도 '멍청도'가 나오면 그 전의 모든 것이 무효가 되는 거다. 그리고 '마지막 한 칸 남은 상황에서는 무조건 개로 난다' 이런 규칙. 그거 있으면 정말 끝내준다. 한 판이 당최 끝이 안난다. 하하.
―어릴 적 세뱃돈에 대한 추억은.
▲큰아버지가 많이 줬었다. 그거 받아서 장난감 참 많이 샀다.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있나.
▲글쎄…. 아하, 하나 있다. 쌍절곤. 잊고 있었는데 갑자기 생각났다. 초등학교 3~4학년이었던 것 같다. 그 때 인천에 살았는데 비디오 플레이어를 아버지가 처음 사오셨다. 그게 그렇게 신기할 수가 없었다. TV 녹화가 되는 것도 있었지만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고. 그냥 플레이만 가능한 거였다. 한참 중국 배우 정소추에 빠져 있었다. 중국 무협 영화였는데, 제목은 잘 생각이 안나지만, 암튼 시리즈로 나오는 거였다. 그 때부터 중국 무협에 빠져서는 막 날라다니고, 장풍 쏘고 그러는게 꿈이었다. 이소룡도 뺄 수 없지. 권법책을 사다가 안무 외우 듯이 배우고 그랬다. 하하.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기네. 암튼 그 때 산 게 쌍절곤이다.
뮤지컬 '영웅'은 안중근 의사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린 작품으로 정성화는 2009년 초연 때부터 벌써 7번째 안중근 의사 역을 맡아오고 있다.
―혹시 지금도 갖고 있나.
▲그럴리가~. 그 쌍절곤을 늘 가방에 넣어다녔었다. 넣고 다니다 보면 정의의 사도가 될 수 있을 듯했다. 왜 그런 거 있잖나. 어린이와 여인이 위험에 빠졌을 때 딱 등장해서 구해주는 멋진 남자. 아마 그런 걸 생각했던 것 같다. 하하하. 웃기지도 않았네 정말~. 암튼 그거 들고다니다가 어느 날 중학생 형들에게 빼앗겼다. 정말 몇 날 며칠을 울었는지 모른다. 내 모든 걸 뺏긴 것만 같았다.
―한복은 자주 안 입나.
▲잘 못 입죠. 결혼식 때 한 번, 아~ 딸 돌잔치 때 입었구나. 오늘 같은 날 아니면 입을 일이 없다. 그런데 정말 한 번 해보고 싶었다. 왜 방송이나 신문 같은 거 보면 명절 쯤 유명인이 한복 입고 절 하는 사진 있잖나. 그런 건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서야 가능한 거니까. (그 말은 올라섰다는 의미?) 뭐, 그런걸로 치면 그런건가. 하하. 배우나 개그맨이나 이쪽 일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그렇지 않나. 그 정도로 올라서고 싶다 그런 목표. 그런 면에서 뭐, 한복 입고 사진 찍을 정도는 된건가 싶다. 하하.
―결혼 후 명절에 바뀐게 있다면.
▲당연히 결혼 전에는 우리집 한 곳만 가도 됐다면 이제는 두 군데를 가야한다는 거지. 처갓집에 죄송한 게, 주소지가 경기도 고양시 벽제동이다. 그쪽이 큰 추모공원이 있어서 명절에 어마어마하게 막힌다. 큰집이 안양인데 낮에 출발하면 저녁, 밤에 도착한다. 애가 아직 어리니까 많이 지치고 그랬다. 그래서 부모님이 설에는 오지 말라고 배려를 해줬다. 명절 전주나 그 다음주에 간다. 뭐 그런 것 뿐만은 아니지만 정말 좋으신 분들이다. 매번 잘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뮤지컬배우들은 명절에 더 바쁘다는데, 요즘 많이 바쁘겠다.
▲맞다. 명절에 쉬기 쉽지 않다. 그래도 이번 설에는 다행히 '영웅' 공연 스케줄이 잘 나와서 설 당일과 그 다음날 공연이 없다. '영웅' 마치고는 좀 쉬면서 가족과 여행도 가고 할 생각이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담은 뮤지컬 '영웅'은 8년간이나 함께 공연했는데.
▲초연 때부터 참여해왔다. '영웅'은 제 가치를 증명해준 작품이니 특별하다. 행복하게도 제작사와 관객들이 좋아해주시니까. 앞으로도 계속 함께 할 수 있다면 끝까지 하고 싶다. 그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이다. 특히 음악 자체가 주는 뜨거움이 있다. 이건 봐야 안다. 많이들 보러 오시라.
―내가 생각하는 영웅이란.
▲아까 말했듯이, 어렸을 땐 중국 무협 배우였다. 물론 시간이 가면서 바뀌었지만. 하하. 사실 각자의 영웅은 다르다. 안중근 의사처럼 많은 이들을 위해 희생한 사람도 당연히 영웅이지만, 한 자리에서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내는 사람도 영웅이라고 생각한다. 새벽마다 두부 파는 아줌마, 매일 새벽을 헤치고 별 보며 돌아오는 아버지, 그런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유지되는 거 아닐까. 우리 모두가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뮤지컬어워즈 남우주연상도 받고, 올 초부터 기운이 좋다.
▲너무 감사하다. (상 받을 줄 몰랐나?) 정말 몰랐다. 그래서 정말 놀랐다. 사실 이런 시상식은 미리 수상자에게는 눈치를 준다. 우리는 공연이 계속 있으니까 시간이 안된다고 하면 '잠깐만 왔다 가라' 뭐 그렇게. 근데 그날 '영웅' 리허설이 있어서 안된다고 했더니, '어쩔 수 없죠'라며 두 말도 안하더라. 그래서 '난 아니구나' 했다. 김준수, 조승우 후보들도 화려하고 그래서 기대도 안했고. 근데 생각보다 리허설이 빨리 끝나서, 뮤지컬계 축제니까 얼굴이나 비추자 해서 갔더니 내가 수상자였다. 수상 소감도 준비가 안돼 있었다. 깜짝 놀라서 더 기뻤던 것 같다. 이런 상을 탄다는 것은 뮤지컬 배우에게는 로또나 다름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파이낸셜뉴스 독자들에게 덕담 한 마디.
▲요즘 경제도 그렇고 참 많이 어렵다. 어려운데, 제 경험 상 어렵다 어렵다 하다보면 몸과 마음이 움츠러든다.
그래서 주변에 감사할 것들도 그 어렵다는 말 때문에 참 놓친 게 많다. 올해는 감사할 것들에 대해 되새겨보는 한 해가 됐으면 좋겠다. 그러다 보면 우리 사회도 빨리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 새해는 더 사랑합시다!
yjjoe@fnnews.com 조윤주 기자
뮤지컬 배우 정성화가 파이낸셜뉴스 독자들에게 설 메시지를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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