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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 레저] 별빛 아래 거니는 궁, 가슴 울렁이는 밤마실

경복궁 별빛夜行
소란스러운 도시에서 탈출.. 조선의 밤으로 발을 내딛다
아른거리는 청사초롱을 따라 근정전과 사정전 둘러본 다음
안내받는 곳은 주방인'소주방'
판소리 들으며 수라상 맛보니 눈과 귀와 입이 모두 즐거워

따뜻한 기운이 완연한 봄.

살랑이는 바람이 귓가에 여행을 떠날 때라고 속삭이는 계절이 왔다.

분주한 일상 속에서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지만 갈 수 없는 도시인들.

잠시나마 호젓한 공간으로 떠나고 싶다면 멀리 갈 것 없다.

서울의 중심에 자리잡은 경복궁이 문을 활짝 열고 오라 손짓한다.

[yes+ 레저] 별빛 아래 거니는 궁, 가슴 울렁이는 밤마실
바람 한 점 없는 봄밤, 거울 같은 연못에 경회루가 비치고 있다. 청사초롱을 든 경복궁 별빛야행 관람객들이 경회루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박범준 기자


한낮의 북적이는 고궁의 풍경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면 해질 무렵 별빛 따라 훌쩍 밤마실을 가보자. 문화재청과 한국문화재재단이 내달 14일까지 '경복궁 별빛야행'을 진행한다.

최근에 복원된 소주방에서 조선시대 대장금이 만들었을 수라를 맛보고 낮에는 공개되지 않았던 후궁의 방에 들어가 연꽃으로 가득 덮인 연못을 바라보며 봄밤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경복궁 협생문을 지나 궐 안으로 들어서면 본격적인 별빛야행이 시작된다. 광화문 밖에서 타고 들어오던 소란스러움도 흥례문을 넘어서면 고요해진다. 이내 곧 조선 왕조의 위엄을 상징하는 '근정전(勤政殿)'이 야행객을 맞이한다.

부지런히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겠다는 의지를 담은 이름을 가진 이 전각은 경복궁에서 제일 웅장한 건물이다. 수백년 전 근정전 앞 너른 마당에는 품계석을 따라 문신과 무신이 늘어서서 왕의 즉위식 등 조선의 대례를 치렀다. 근정전은 왕이 앉는 용상을 중심으로 설계됐다.

천장을 바라보면 일곱개의 발톱을 가진 7조룡 두 마리가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고종 4년인 1867년 11월 중건하면서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자주의식을 담았다. 근정전 바로 뒤에는 '사정전(思政殿)'이 자리잡고 있다. 경복궁을 처음 설계했던 정도전이 왕에게 '생각하고 정치하라'라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사정전은 왕이 평상시에 정사를 보는 집무 공간으로 흔히 '편전'이라고 불린다. 왕과 신하가 머리를 맞대며 학문을 토론하는 경연을 벌였던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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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전에서 바라본 흥례문. 조선시대 왕들이 남쪽을 향해 바라보던 시선 너머엔 이제 고층빌딩이 늘어섰다. 사진=박범준 기자

[yes+ 레저] 별빛 아래 거니는 궁, 가슴 울렁이는 밤마실
조선시대 왕과 왕비가 일상적으로 먹었던 12첩 반상을 현대식으로 재해석한 '도슭수라상'

■대장금이 만들었을 '도슭 수라상'의 맛

나라를 다스리는 대표적인 공간을 보고 나서 야행객들의 발은 '소주방'으로 인도된다. 우리에게는 '수랏간'으로 익숙한 이곳은 궁에서 음식을 준비하던 곳으로 2년 전인 2015년 5월 약 100년 만에 복원돼 일반인들에게 개방됐다. 수랏간은 크게 외소주방과 내소주방, 생물방의 셋으로 나뉘는데 외소주방은 행사나 큰 연회 때 먹을 음식을 만드는 곳이고 내소주방은 왕과 왕비가 평상시에 먹는 수라를 담당하는 곳이다. 생물방은 '생물(生物)'의 뜻 그대로 날 것인 간식을 만드는 공간이다.

야행객들은 이곳에서 조선시대 왕과 왕비가 평상시 먹었던 12첩 반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도슭 수라상'을 맛보게 된다. 여기서 '도슭'은 도시락의 옛말로 4단 유기합에 명란젓갈과 탕평채, 황태구이, 더덕구이, 전복초, 진지(밥), 호박전, 생선전유화, 너비아니산적, 배추김치, 오이송송이, 원추리나물, 육포장아찌, 생선지지미 등이 담겼다.

음식을 준비한 한국문화재재단의 이건 이사는 "조선시대에도 날씨가 추울 때 왕이 계신곳으로 식사를 따뜻하게 배달하기 위해 이처럼 도시락과 같은 찬합을 보자기로 싸지 않았을까 생각했다"며 "도슭수라상의 12가지 음식은 선조들의 음식철학인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약식동원(藥食同源)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수라를 먹는 동안 소주방의 뜰에는 판소리 등 흥겨운 전통 국악 공연이 다채롭게 펼쳐진다. 눈과 귀와 입이 조화롭게 만족할 수 있는 시간이다. 수라를 다 먹고나면 야행객들에게 따뜻한 차가 한잔씩 제공된다. 향련다(香蓮茶)라는 이름의 수련차로 영조 때 세손인 정조가 병상에 있자 내의원에서 올렸던 궁중약차다.

[yes+ 레저] 별빛 아래 거니는 궁, 가슴 울렁이는 밤마실
소주방에서 '도슭수라상'을 먹는 동안 마당에서 흥겨운 국악 공연이 이어진다. 사진=박범준 기자

■별빛야행객에게만 허락된 후궁의 방

배를 든든히 한 야행객들이 다음으로 향하는 곳은 궁의 여인들이 생활하던 은밀한 공간이다. 바로 왕비와 대비, 후궁들이 거처했던 '교태전'과 '자경전' '함화당' '집경당'이다.

만사형통을 기원하는 '만통문'을 넘어서면 왕비의 휴식공간인 동시에 공식적인 업무가 이뤄졌던 교태전이 있다. 사방이 담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경복궁의 한가운데 있기에 중궁, 중전이라 불린다. 왕의 휴식공간인 '강녕전'은 교태전의 코앞에 있다. 왕의 여인들은 입궐 후 바깥 출입을 하지 못했는데, 주로 머무르는 거처마저 사방의 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니 아늑했을 수도 있겠지만 때론 얼마나 갑갑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한 답답함을 달래기 위해 만든 '아미산'은 교태전의 후원이다. 언뜻 보면 화계와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각각의 층이 좁은 화계와 달리 층층이 올라 설 수 있게 꽤 넓은 계단식 정원이다. 총 4.5m의 높이로 조성된 아미산은 마치 경복궁을 뒤에서 감싸 안는 북악산과 연결돼 있는 듯한 착시를 준다. 그래서 '산'이 붙었다.

교태전을 벗어나 2시 방향으로 가다보면 대왕대비가 거처하던 침전 '자경전'이 나온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이 아들인 고종을 왕으로 옹립하는 과정에서 신정왕후의 도움을 받은 것에 감사를 표하고자 경복궁 중건 때 교태전보다 더 아름답게 지었다고 한다. 자경전의 외벽에는 좌측부터 매화, 복사꽃, 목단, 석류, 국화 등 부조로 철마다 피는 꽃나무를 새겨 놓았다. 자경전에서 특히 주목해 볼 것은 뒷마당의 굴뚝이다. 보물 815호로 지정돼 있는 이 굴뚝의 벽은 대비의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십장생과 박쥐가 부조로 새겨져 있다.

자경전을 빠져나와 다음으로 향하는 곳은 후궁들의 거처인 함화당과 집경당이다. 일제시대에 궁궐의 많은 부분이 훼손됐지만 이 두 곳은 남아 한때 조선총독부 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번 야행에서 함화당과 집경당은 야행객들에게 내부까지 선보인다. 평상시엔 관람객의 내부 입장이 제한돼 있지만 문화재청은 이번 별빛야행을 위해 특별히 이 두 곳의 입장을 허용했다. 신발을 벗고 방안으로 들어서면 온돌바닥의 따뜻한 기운이 전해진다. 아궁이에 백숯을 태워 방을 덥힌 것도 관람객을 위한 특별 배려다.

향원정은 경복궁 북쪽의 후원 영역에 자리잡은 네모난 연못, 향원지의 가운데 자리잡은 정자다. 봄이 오면 연못에 연꽃이 가득해 향기를 멀리까지 피운다 해서 '향원'이란 이름이 붙었다. 왕실의 사적인 휴식공간으로 사용된 향원정은 생각보다 자그마해서 한 층에 최대 여섯명 정도가 아늑하게 앉을 수 있다. 1층은 추운 계절을 위해 온돌을 깔았고 2층은 여름을 위해 마루를 놓았다. 향원지의 한쪽 구석에는 샘이 있어 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yes+ 레저] 별빛 아래 거니는 궁, 가슴 울렁이는 밤마실
별빛야행 관람객이 조선말기 경복궁의 서재 역할을 했던 '집옥재' 내부에 들어와 전시된 고서를 보고 있다. 사진=박범준 기자

■화려한 불빛으로 둘러싸인 축제의 장 '경회루'

왕실과 궁중여인들의 내밀한 곳에서 다시 벗어나 이제는 외국 사신과 귀빈들을 맞이했던 외교의 장소로 향한다. 향원정의 좌측 길을 따라 북쪽으로 향하다 보면 '집옥재'가 나온다. 일반적인 경복궁 건축물과 달리 집옥재는 청나라 건축양식이 가미돼 양옆 벽을 벽돌로 쌓아 만들었다. 조선 말기 고종황제는 집옥재를 책을 보관하는 서재와 사신 접견장소로 사용했다. 당시 집옥재에 보관된 책은 4만권 가까이 됐다고 한다. 이러한 과거의 쓰임을 현재에도 적용해 문화재청은 집옥재를 궁궐 속 작은 도서관으로 꾸몄다. 궁을 방문한 관람객들은 오후 3시까지 집옥재에서 각종 도서를 열람할 수 있다.

별빛야행의 대미는 경회루가 장식한다. 처음 야행을 시작할 때 마주한 근정전과 더불어 국보로 지정돼 있는 경회루는 과거 만원짜리 지폐의 뒷면 배경으로 쓰이기도 해 익숙하다. 낮에 보아도 웅장함을 자랑하지만 밤에 보는 경회루는 더욱 아름답다. 바람이 없는 날이면 불빛에 경회루가 연못에 거울처럼 비친다. 연산군이 경회루 연못 한가운데 만들었다는 인공 섬에는 각종 희귀식물이 여전히 식재돼 아름다움을 뽐낸다. 경회루의 풍경에 감탄하고 있을 무렵 어디선가 들려오는 대금 소리가 사람들의 발길을 이끈다.


이번 별빛야행에서 경회루 역시 야행객들에게 관람이 허용됐다. 경회루에 오르면 가운데 대금주자가 앉아 아름다운 연주를 선사한다. 그간 잊고 있었던 마음 속 풍류를 되찾는 추억 가득한 밤이 될 것이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