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호, 이 사람은 배우가 천직이다. 주연으로 나선 내로라하는 작품은 없지만 그의 얼굴이 스크린과 브라운관에 떠오르면, 결코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캐릭터의 옷을 입든 자유자재로 소화해낼 수 있는 이유는, 연기를 향한 열정과 애정이다. 사람 좋게 웃다가도 연기에 대해서는 한없이 진중해지는 김상호는 꼭 ‘보통사람’의 추재진 기자와 닮았다. 그는 자신이 세워놓은 신념을 지키며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보통사람’이다.
영화 ‘보통사람’은 대한민국 현대사 중에서도 격동의 시기였던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그 험난했던 시대적 애환 속에서 상식이 통하는 시대를 꿈꿨던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김상호는 권력 앞에서도 꿋꿋하게 옳음을 지켜내는 기자 추재진 역으로 분했다.
“인간적으로 다가왔어요. 딱 보고, 특별함 없이 사람처럼 해내야겠구나 싶더라고요. 처음에 감독님과 시국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어요. 그저 추재진이라는 인물이 ‘보통 사람’에 잘 녹아 들어가고 있는지, 관객들이 튕겨내지 않을까에 대한 고민만 했죠. 너무 특별하거나 도드라지면 관객 분들이 ‘쟤 뭐하냐?’ 싶으실 거예요. 그러면 재미없죠. 과하게 가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김상호는 나름의 파격(?)변신을 했다. 기존 우리가 알던 김상호와는 달리, 가발을 쓰며 머리 스타일링에 변화를 꾀했다. 초반에는 낯선 느낌이 강하게 들다가, 이야기가 흘러갈수록 어느새 익숙해졌고 그 변화의 당위성을 깨닫게 된다.
“처음에 감독님이 가발을 쓰자고 하셨어요. 저는 그게 왠지 저를 꾸민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처음에는 안 한다고 버텼는데, 이틀 뒤에도 또 가발을 하자고 하더라고요. 그 때 ‘아, 이 사람 진짜 가발 씌우고 싶구나’ 싶었어요. 지금까지의 김상호 이미지를 바꾸고 싶다는 게 이유였어요. 저도 걱정되는 게 있다고 말씀드렸죠. ‘저 대머리인 거 모두 다 아는데 가발을 쓰면 희화화되지 않겠냐’고 물었는데 괜찮다고 하셨어요. 다 책임진다고 하셔서 믿고 맡겼어요. 처음에는 꾸민 거 같고 너무 싫었어요. 그런데 스태프 분들한테 물어보니까 진짜 머리 같다고 잘 어울린다고 하시던데요. 또, 시간이 지나니까 눈에 익더니 끝날 때는 아주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어요. 그 가발 되게 비싼 거예요.(웃음)”
김상호는 앞서 영화 ‘모비딕’에서도 진실을 파헤치는 기자로 열연했다. 물론, ‘모비딕’은 1990년 당시 보안사 소속이었던 윤 이병이 군의 민간인 사찰 사건을 밝힌 실화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픽션인 ‘보통사람’과는 뿌리가 다르지만 결은 유사하다. 두 작품에서 정의로움을 장착한 김상호의 캐릭터들은 진실로 다가선다. 그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에 휘말리며 결코 순탄치 않은 끝을 향해 달려간다.
“‘모비딕’ 때의 저는 장치적인 역할이죠. 제 캐릭터가 어떻게 됨으로써, 극중 황정민 씨나 김민희 씨가 사건을 파헤칠 수 있도록요. ‘보통사람’의 추재진 기자도 비슷해요. 정의라는 단어가 계속 나오는데, 사실 대본을 받고 찍을 때까지 정의라는 단어를 단 한마디도 안 했어요. 이후 인물을 소개시킬 때 적합한 단어를 정의라고 세운 것뿐이에요. 저는 그저 할 일을 하는 기자라고 생각했어요. 특별하고 정의롭게 보이지만 그냥 할 일을 하는 것뿐이에요.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이 정의롭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걸요.”
1980년대의 이야기라 예상은 했지만, 그 이상으로 훨씬 더 참혹하고 눈을 질끈 감게 되는 고문 장면들이 연달아 등장한다. 김상호 역시 고문을 당하며 끔찍한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그 인고의 순간들이 분명히 배우 개인에게 있어서도 감정 소모가 엄청났을 터.
“다른 분들은 짐승의 시간이라고 하셨어요. 저도 심적으로 되게 힘들었어요. 추재진이라는 인물은 버텨내야 하거든요. 상대는 그의 신념을 꺾어 내리려는 사람들이에요. 그게 너무 힘들었고 울기도 정말 많이 울었어요. ‘컷’만 하면 눈물을 정말 많이 흘렸죠. 그리고 뒤에서 고문하는 사람들도 보통 사람들이 아니에요. (고문 받는 사람들이) 죽을 것 같은 괴성을 지르는데 그걸 듣고도, 그 소리를 계속해서 내게 만들어야 하잖아요. 그것도 참 지옥일 거예요. 불쌍하고 아파요.”
김상호는 언론시사회를 통해 기자 역을 준비하고 연기하는 과정에서 ‘뉴스타파’의 이상호 기자를 떠올렸다고 밝혔다. 여러 험난한 과정 속에서도 진실을 알아내려는 이상호 기자의 모습에서 추재진이 가지고 있던 소신과의 유사함을 발견했던 것일까.
“한참 찍고 있다가, 어떤 부분에서 이상호 기자가 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이상호 기자도) 불합리를 많이 당했잖아요. 그 분도 많이 화가 났겠구나 싶었어요. 저는 이 작품에서 의식적으로 욕을 하지 않아요. 기자들은 말할 수 있는 스피커가 있으니까요. 말하고 싶으면 써서 보여주면 되죠.”
그렇다면 실제의 87년도 김상호는 어땠을까. 당시 17살이었던 그는 시국 안에서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저 자신과의 끝없는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찍을 때도 그랬지만 전혀 그 당시가 어떠했는지는 생각을 못했어요. 생각해보면, 고등학생 때라 진짜 철모르고 놀았어요. 시국이 어떤 건지도 몰랐죠. 제가 사춘기에 빠져서 고등학교를 두 번 다니다가 다 관뒀어요. 집이 너무 가난해서 ‘내가 돈을 벌어야지 학교 다녀서 뭐하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대구의 안경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퇴근길에 또래 아이가 가방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부러워서 다시 학교를 다녔어요. 그런데 또 관뒀죠. 그 때는 돈 벌 생각이 저를 지배했어요. 어른들이 공부 하라고 하시잖아요. 그 때 저는 절대 후회 안 할 거라고 했는데, 어른들 말이 맞았어요.(웃음)”
‘보통사람’에는 조달환, 라미란, 지승현 등 많은 신스틸러들이 등장한다. 그 중, 눈에 띄는 특별한 배우가 등장하는데 그 주인공은 오연아다. 오연아는 추재진을 따르는 후배 사진기자 박선희 역으로 열연했다.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표정만으로도 그녀의 캐릭터의 몰입케 만든다. 그 덕에, 김상호는 물론 손현주와도 진행된 인터뷰에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첫 등장씬이 신문사인데, 찍고 나서 모니터를 확인할 때 제가 감독님께 (오)연아 좀 보라고 했어요. 보면서 연기 정말 잘한다고 생각했죠. 주변 소음이나 그런 모든 것들을 흡수해버리더라고요. 원래 연아 캐릭터에게 풍성한 소스는 없었는데, 연아가 캐스팅된 후부터 풍성해졌어요. 정말 잘하는 배우에요 축구선수로 치면 후반부에 들어가서 상대의 한 쪽을 무너뜨리는 역할이에요. 상대 진영을 뒤흔들죠.”
민감한 시기의 이야기라 2년이라는 길고도 어려운 투자 과정을 거치기도 했지만 2017년인 지금, 어쩌다보니 시국과 묘하게 맞닥뜨리는 바람에 ‘보통 사람’에게도 분명히 긍정적인 방향이든 부정적인 방향이든 영향을 미칠 게 분명했다.
“너무 정세가 급변했죠. 그저 잘 완성시켜서 개봉됐으면 좋겠다고 생각만 했었어요. 저희한테 어떤 영향을 줄지는 잘 모르겠어요. 개봉만 되길 바랐었는데, 지금은 손익분기점은 넘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생겼어요. 참 인간이라는 게 얍삽해요.(웃음)”
인터뷰 내내 김상호는 소탈했고 자유분방했다. 날씨도 좋으니, 낮술이라도 하면 좋겠다고 말을 건네며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그는 사람 냄새가 가득 나는 배우였다.
“저는 원래 되게 소심한 사람이에요. 용기도 없고요. 그런 모습들이 제 스스로도 싫고, 도움도 안 되니까 이렇게 됐죠. 만들어진 것은 아니에요. 이게 이제 제 모습이죠. 남들하고 재미있게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심각한 일을 할 때는 심각하고요. 보편적으로는 재미있고 즐거우면 좋잖아요. 어른들이 그러셨어요. 술은 나쁜 걸 좋게 만들고, 좋은 걸 더 좋게 만드는 것이라고요.”
연극을 통한 배우 데뷔로는 23년, 충무로에 입성한지는 17년 가까이 된 그에게 아직도 배우로써 꿈꾸는 게 있냐고 묻자 “이런 질문을 들으면 유명한 영화나 이야기가 나와야하는데 저는 그런 것 없어요. 유명해지고 돈 많이 벌려고 했을 뿐이에요. 제가 죽을 때까지 배우를 하고 있다면, 죽고 나서 그런 평가가 나오겠죠? 제가 만약에 여기서 실수를 한다면 (배우로써 끝난 거니까) 꿈을 이룬 게 아닐 거예요”하고 말하더니 스스로 멋진 말이라며 호탕하게 웃었다.
“다시 태어나도 배우로 태어날 거예요. 배우가 안 된다고 하면 카메라맨이 될 거고요. 저한테 주어진 일을 정말 잘해내고 싶어요. 세계 최고로.“
/fnstar@fnnews.com fn스타 이예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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