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연예인이 이미지 메이킹을 잘 한다고 해도, 인사를 건네는 찰나의 순간 그리고 일대일로 마주앉아 한 시간 가량 대화를 나누는 시간,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스칠 때가 있다. 집중도가 최고조로 이른 상태에서 나누는 대화 속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 말투, 습관, 잠깐 지은 표정 등은 숨기기가 힘들다.
늘 ‘함께’ ‘모두’ ‘덕분에’ ‘혼자 만들어낸 것이 아닌’이라는 표현을 자주 쓰던 배우 임화영은 감탄이 절로 나오는 사람이었다. “‘김과장’에서 무엇이 남았냐고 묻는다면 사람”이라고 거듭 강조하던 임화영의 말은 스스로 ‘남는 사람’임을 증명했다.
KBS2 드라마 ‘김과장’ 속 임화영은 다방 레지 출신으로 TQ그룹 커피숍 아르바이트생을 거쳐 경리부 직원까지 이른 오광숙을 연기했다. 시종일관 유쾌한 기운을 내뿜는 광숙이 캐릭터는 20% 가까이 치솟은 드라마의 인기와 함께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드라마가 어떻게 될까 생각은 잘 안 해요. 어떻게 극에 잘 녹아들어 캐릭터를 표현할까 고민하죠. 그런데 첫 촬영 갔을 때 잘 될 것 같은 낌새를 조금 느끼긴 했어요. (웃음) 긴장감이 맴돌아야 하는데, 현장 분위기가 진짜 좋았거든요. 방송에서도 그 느낌이 은연중에 드러났던 것 같아요.”
임화영은 현장에 대해 “연기할 맛이 났다”고 설명했다. 배우가 연기하기 최적화된 환경인데 더 무엇이 필요할까. 심지어 매니저들도 현장에 빨리 가고 싶다고 할 정도로 모두 함께 어우러지는 ‘김과장’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최고였다.
“아무래도 사람들하고 같이 일하다보니 팀워크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후반부로 갈수록 지치는데, 저희는 피곤한 내색 없이 밤 샐 수 있다며 웃으면서 촬영했죠. 다들 장난기도 많고, 서로 극중 인물화돼서 같이 애드리브도 하고, 그 틈에서 행복했어요. 동료 배우들이나 선배들이 연기하는 거 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는 것 같고, 다른 시야로 분석하는 것도 관찰하고요.”보통 미니시리즈 촬영은 생방송급으로 긴박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김과장’은 대부분의 애드리브를 허용하고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촬영을 여러 번 할 정도로 이례적이었다. 덕분에 리얼리티가 살고, 울림 깊은 웰메이드 드라마로 탄생했다.“오히려 감독님이 ‘이 장면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제안하셔요. 덕분에 그 인물에서 나올 수 있는 행동들을 더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꽈장님’이라고 김성룡(남궁민 분)을 부른 것도 제 의견이에요. 광숙이가 애교 있기도 하고 성룡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니 좀 더 강조해서 부르지 않을까 싶었죠. 이 외에도 자음 발음을 좀 더 세게 했어요. 저 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들이 애드리브를 자유롭게 했답니다.”
가장 얇은 롯드로 만 듯 뽀글거리는 파마머리와 ‘투 머치’한 패션을 선보인 오광숙은 드라마의 활력소 노릇을 톡톡히 했다. 높은 톤의 애교 섞인 목소리와 과장된 표정과 행동은 광숙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정말 매력적인 캐릭터에요. 오디션 볼 때도 이것저것 방향을 잡아서 갔죠. 그 때 목소리 톤도 높게 잡았었고요. 촬영에 들어갈 때 오디션에서 했던 것들을 접목시켜보라고 하셨는데, 혼자만 생각했다면 한계가 있었을 것 같아요. 스태프 분들도 소스를 주시고 외적인 면도 신경 써주셔서 광숙이의 매력이 배가된 것 같아요. 감독님은 광숙이 스타킹, 네일까지 신경써주셨어요.”
특유의 뽀글머리는 모든 스태프들이 달라붙어 완성됐다. 임화영의 말에 따르면 광숙의 머리 안 만져본 사람이 없을 정도. 그는 “엉덩이는 조금 아팠지만, 모든 분들의 손을 통해 광숙이로 변해가는 게 보여서 즐거웠다. 뒤에서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기 때문에 그 인물로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잘해야지 다짐했다”고 전했다.비록 메인 줄거리를 이끌어가는 캐릭터는 아니만, 임화영이 배역에 임하는 자세는 한결같았다. 그는 “이유 없는 건 없다”면서 광숙이 행동 하나하나에 그 이상의 의미가 담겨있음을 설명했다. 중간 중간 굵은 목소리로 속마음을 드러내며 반전 웃음을 이끌었던 것도 사실 깊은 뜻이 있었다. 불평불만을 제대로 털어놓지 못하는 직장인들을 대신해 속 시원한 돌직구를 날린 것이다.“광숙이가 다른 배우들하고 붙을 때 너무 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감독님이 ‘광숙이니까’ 괜찮다고 해주셔서 편안하게 풀어질 수 있었어요. 또 연기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서 상대방과 어우러져야 나올 수 있는 건데, 다 함께 잘 버무려진 것 같아요. 놓치고 갈 수 있는 부분까지도 다 합이 좋았어요.”
‘김과장’에는 구멍이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모두가 뛰어난 연기력과 존재감을 발휘했다. 남궁민, 남상미, 김원해, 박영규 등 임화영이 첫 대본 리딩 현장의 문을 열고 깜짝 놀랄 정도의 라인업이었다.
“김원해 선배님은 ‘시그널’ 때 뵀는데 붙는 신은 하나밖에 없었어요. 그때도 대단하셨는데, 옆에서 보면서 더 존경심이 높아졌어요. 언제 한 번은 ‘여기서 이렇게 한번 해봐’라고 호흡을 제시해주셨는데, 제가 뒤에 가서 써 먹으려고 생각해뒀던 거였어요. 정말 소름이...(웃음)”
특히 ‘김과장’에는 김원해를 비롯해 김강현, 조현식, 류혜린, 김선호 등 연극계에서 내로라하는 배우들도 한데 모였다. 주연과 조연, 단역 등 구분이 없다고 생각한다던 임화영은 신이 난 말투로 다른 배우들의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극중 체리로 나왔던, 그 ‘엉덩이 따귀녀’요. (웃음) 그 친구도 대학로에서 진짜 유명하거든요. 현장에 도착해서 차분하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는데, 슛이 들어가고 완전 달라져서 다들 빵 터졌어요. 선호는 연극계의 아이돌이죠. 선상태를 잘 그려냈기 때문에 극 후반부 반전 이미지도 잘 통한 게 아닌가 싶어요.”
자신이 연극판에서 활동했던 그 때를 회상하듯 수다를 떨던 그에게서 문득 문득 광숙이의 표정과 톤이 나왔다. 심지어 눈썹을 움직이는 것도, 원래 임화영의 모습인지 광숙이가 아직 남아있는 것인지 헷갈리게 만들었다.
“광숙이의 애교와 단호박 같은 면모 빼고는 다 저에게 있는 모습 같아요. 그런데 광숙이를 하고 나서 다들 제가 애교가 늘었다고 하시더라고요. (옆에서 일하던 홍보팀이 갑자기 고개를 들어 격하게 끄덕였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무대인사 갔을 때도 혼자 방방 뛰고. (웃음)
선배님들이, 연기는 내 안의 또 다른 모습을 비추는 거라 ‘내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하신다더라고 해요. 선을 잘 지켰다가 그걸 또 깨뜨릴 줄 아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전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그런지 아직 온오프가 안되더라고요.”
그렇지만 임화영은 이미 광숙이를 배움의 발판으로 삼아 바삐 움직이고 있다. 미리 촬영해둔 영화이긴 하지만, 임화영은 최근 개봉한 영화 ‘어느 날’과 ‘석조저택 살인사건’에서 다시 한 번 모습을 비췄다. 여기에서는 ‘꽝숙이’와 전혀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인물들을 연기했다.그는 “이렇게 발랄하던 친구가 ‘어느 날’에서 선화로 나오는데요...”라며 갑자기 자신의 영화를 홍보해 빵 터지게 만들었다. “아, 소속사 홍보팀도 겸하고 계신 거냐”고 우스갯소리를 던졌더니, 임화영은 ‘마침 잘 됐다’는 말투로 가족 같다는 소속사 직원과 대표, 소속 배우들을 칭찬하며 지금 이 탄탄대로의 공을 돌렸다.
그의 말을 따르자면, 임화영은 앞으로 ‘사부작 사부작’ 걸어갈 예정이다. 이 표현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면서도 발걸음을 재촉하지도, 느린 걸음을 탓하지도 않는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광숙이는 너무 좋은 친구였어요. 그동안 차분하고 진지한 역할만 했는데, ‘김과장’에서 스스로를 내려놓고 연기할 수 있어서 폭이 넓어진 것 같아요. ‘김과장’은 끝났지만, 다들 제 영화를 보시고 골라 먹는 재미가 있는 아이스크림처럼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여기 나왔던 얘가 얘였어?’ 이런 반응이 제가 원하는 거예요. 각기 다른 장르에서 잘 녹아들었구나, 하고 그 느낌을 받아주셨으면 하는 게 연기자로서의 바람입니다.”
/lshsh324_star@fnnews.com 이소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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