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츠리고 왔다가 가슴 펴고 돌아갔다. 제70회 칸국제영화에 참석한 ‘불한당’의 배우들, 설경구 전혜진 김희원 임시완의 얘기다. 그들은 불과 2박3일, 임시완은 1박2일의 일정 속에 ‘굵고 짧게’ 칸에서 큰 사랑과 박수를 받았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 감독 변성현, 제작 CJ엔터테인먼트·풀룩스㈜바른손, 배급 CJ엔터테인먼트)의 배우들이 23일 인천공항을 출발할 때만 해도 세계 최고의 영화제에 초청된 배우들의 자부심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움켜진 주먹에는 파이팅의 기운보다는 영화의 아버지라 할 감독 없이 타국으로 떠나야 하는 1녀3남의 자식들 같은 움츠림이 읽혔다.
분위기는 반전됐다. 프랑스 칸 뤼미에르극장에서 24일 밤 11시(이하 현지시간) 열린 미드나잇 스크리닝 공식상영회의 레드카펫에 ‘서는’ 순간부터다. 흔히 늦은 시각 개최되는데다 황금종려상을 두고 다투는 경쟁부문도 아니기에 카메라가 많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를 배우들은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기대했다가 실망할 수 있는 배우들을 위해 칸영화제 경험이 많은 관계자들이 일러둔 말이었다. 맏형 격의 설경구에게는 긴장해서 성큼성큼 레드카펫을 휙 지나지 말고 천천히 입장하라는 당부가 주어졌다.
하지만 전 세계에서 온 카메라는 비경쟁 미드나잇 상영임에도 빽빽했고 레드카펫은 생각했던 것도 넓고 길어 “그래, 기죽지 말고 우리끼리라도 열심히 즐겨 보자!” 다짐했던 배우들은 긴장 속에서도 다양한 포즈를 취하며 느긋하게 입장했다. 특히 아이돌 가수 출신의 임시완이 카메라를 즐기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배우들은 레드카펫의 끝에서 자신들을 기다리는 박찬욱 감독을 발견했다. 70회 칸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활약 중인 감독 박찬욱이라는 사실은 차치하고 외국인 가득한 낯선 무대에서 발견한 한국인, 그것도 한국영화인들의 대부 격인 박찬욱이 감독의 부재 속에 참석한 그들에게는 헤어진 아버지라도 만난 듯 감격스러웠다. 전혜진은 “카메라 포즈고 뭐고 그냥 달려가 양손을 붙들고 싶은 마음에 순간 울컥했다”고 다음 날 칸 마제스틱 비치호텔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회상했다(이하 배우들의 말은 해변 인터뷰 인용).
박찬욱 감독 옆에는 칸영화제의 띠에리 프레모 집행위원장도 함께했다. 모든 미드나잇 상영에 등장하지는 않는데, 감독 없이 참석한 ‘불한당’ 배우들에 대한 따뜻한 마중의 의미가 컸다. 긴장과 설렘 속에 펼쳐진 레드카펫을 마치고 드디어 박 감독의 손을 맞잡은 전혜진은 반가운 마음에 “우리 영화 재미있게 봐달라고” 말한 뒤, 심사위원에게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싶어 아차 하는 마음에 프레모 위원장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프레모 위원장은 “너희 영화는 비경쟁이니까 맘껏 말해도 된다”고 유머 어린 웃음으로 마음을 편히 해 주었다는 후문이다. 이어진 프레모 위원장의 ‘불한당’ 사랑은 뒤에서 보탠다.
◇ 웃음과 환호, 오프닝부터 ‘세다’
설경구는 상영극장에 입장해 착석할 때까지 박수로 환영해 주는 모습에 “진정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구나” 생각하며 벅찬 마음으로 관람을 시작했다. 충격적 오프닝은 칸에서도 통했다. 술렁술렁 달아오른 분위기는 김희원(조폭회사 오세안무역 고병갑 상무 역)이 깻잎으로 오프닝을 마무리할 때 큰 웃음으로 변했다. 김희원은 “연극에서는 오프닝을 담당하던 배우였다. 영화 쪽으로 와서는 한 번도 하지 못 했다. 개인적으로도 ‘불한당’의 오프닝은 의미가 깊은데, 해외 관객들이 좋아해 주시니까 기분이 좋았다. 영화 촬영 전에 함께 오프닝을 장식하는 김성오 배우, 변성현 감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합을 맞추며 준비한 장면”이라고 설명했다. 김희원은 이후에도 두세 번 더 칸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전혜진(조폭 잡는 형사 천 팀장 역)도 영화 초반 탄성과 환호를 불러일으켰다. 값비싼 러시아산 캐비어를 재떨이 삼는, 당찬 경찰 보스의 모습에 관객은 쾌감의 반응으로 화답했다. 설경구(무적의 불한당 한재호 역)와 임시완(배포 큰 꽃미남 조폭 조현수 역)의 브로맨스를 넘어선, 남녀 간의 밀고 당기는 심리전에 버금가는 호흡에도 웃음과 호응이 일었다.
◇ 감격의 7분 기립박수 “1분인 줄 알았다”
엔드스크롤이 오르기 시작하자 객석에서 환호와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다. 모든 상영에서 엔드스크롤 내내 박수가 이어지지는 않는데, ‘불한당’의 밤에는 그랬다. 영화가 끝나고 스크린에 현장의 배우 모습이 투영되자 환호와 박수는 더욱 커졌다. 설경구를 시작으로 전혜진, 김희원, 임시완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특히 설경구는 “적어도 눈물이 흐르지는 않도록” 돌고래 같은 괴성과 함께 고개를 뒤로 젖히는 액션으로 눈길을 모았다. 영화 속에서는 비열함과 쓸쓸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으하하하’ 웃음으로, 영화 밖에서는 감격을 삼키는 ‘흐억’ 고성으로 큰 재미를 줬다.
기립박수는 7분을 넘겼다. 그 사이 1층의 관객뿐 아니라 2층 관객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환호했고, 경사가 너무 급해 다소 위험한 2층 발코니에서 한 여성관객은 몸을 아래로 숙인 채 양손의 엄지를 흔들어 보이며 자신의 만족감을 뜨겁게 전했다. 설경구는 “프레모 위원장이 두어 차례 퇴장을 안내하는 제스추어를 취했지만, 관객의 반응이 뜨거워 그냥 자리를 뜰 순 없어 버텼다. 위원장도 객석 반응이 뜨거우니까 기다리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프레모 위원장은 한국 언론에 “역대 최고라 할 만한 관객 반응이었다”고 엄지를 세웠고, 다음 날 열린 배우들의 포토콜 행사에도 모습을 드러내 “영화가 너무 좋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감동의 배웅, 거리의 관객 그리고 박찬욱 감독
김희원에게는 마치 1분처럼 짧게 느껴진 7분여의 기립박수를 뒤로 하고 극장 로비로 나가자 그곳에도 어느새 자리를 옮긴 관객들이 박수로 배웅했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한 사람이 다시 서 있었다. 박찬욱이었다. 박 감독은 “영화 잘 만들었다. 최고였다”는 호평으로 감격에 찬 배우들을 다독였다. 설경구는 “시작과 끝을 함께해 주시니 너무 감사했고 감동했다”며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저는 정말 긴장 안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척 한 거였나 봐요. 영화도 왜 이렇게 빨리 끝나는지 어느새 끝이 났고 ‘옥자’ 만큼, 한 5분은 박수 받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1분밖에 안 됐다고 생각했는데 7분이 넘었다는 거예요. 아, 내가 긴장했었구나, 싶었죠. 진짜 1분 같았는데…”
김희원의 바람은 이루어지고도 남았다. 경쟁과 스페셜 스크리닝에 동시에 초청된 홍상수 감독의 ‘그후’와 ‘클레어의 카메라’의 각 4분과 2분, 동일하게 미드나잇 스크리닝을 통해 공개된 ‘악녀’의 4분, 경쟁부문에 소개된 ‘옥자’의 4분여 기록을 껑충 넘어 7분 넘게 박수가 이어졌다. 길이뿐 아니라 박수의 온도도 중요한데 진심 뜨거웠다.
이것으로 끝인가 싶었는데 배우들의 전언에 의하면 극장 밖 길가에서 만난 관객들도 탄성과 엄지를 보냈고, 심지어 오전 3시가 다 된 늦은 시각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배우들이 평상복으로 갈아입고(레드카펫과 포토콜 행사만 진행하고 인터뷰를 못 하고 떠나는 아쉬움에 임시완은 계속 턱시도 차림이었다고) 칸의 거리를 걷는 그 새벽에도 사람들은 그들을 알아보고 환호했다. 음식점에서도 중년의 프랑스 여성이 다가와 영화에 대한 호평과 함께 사진 촬영을 원해 응했더니 너무 좋아했단다.
◇ 전혜진 “쑥스러웠던 칭찬, 이제 즐기면 되죠?”
해가 뜨고야 잠자리에 든 배우들은 피로도 잊은 채 25일 다시 세계의 카메라 앞에 섰다. 지난밤 레드카펫 때보다 당당했고 여유로웠다. 만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리고 이어진 마제스틱호텔 해변에서의 인터뷰에서도 한국 기자들의 격려와 칭찬을 기쁘게 받았다. 영화 출연하기를 잘했고, 칸에 오기를 잘했다는 전혜진은 “이제는 그냥 즐기면 되죠?”라며 쑥스러워 하면서도 허리를 펴고 웃었다.
“아빠 없이 마치 고아가 된 심정으로 한국을 떠난 게 사실이에요. 오기 직전까지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어요. 오기를 정말 잘한 것 같아요. 배우로서 정말 큰 힘 받고 갑니다. 사실 한국영화에서 여성의 캐릭터들이 비슷해요, 당찬 형사 팀장 혹은 여형사 역 많잖아요. 처음에 출연을 고사했던 이유예요. 영화의 소재도 완전히 신선한 게 아니잖아요, ‘신세계’도 있었고…. 변성현 감독에게 비슷한 영화를 왜 또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래서 하려고 한다는 거예요. 비슷하지만 다르게 할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모습에서, 그래, 하자, 결정했어요. 영화도 그렇게 자신감 있게 만들었고, 칸까지 오게 됐는데 정작 감독은 이걸 함께 누리지 못해 안타까워요. 내일 욕먹더라도 오늘은 여기서 칭찬 받았으면 어땠을까 싶네요.”
◇ 설경구 “연출․촬영․조명․미술감독의 열정이 빚은 영화”
섹시하다는 평가를 국내는 물론 칸에서까지 계속 듣고 있다는 설경구는 사진을 찍을 때도 대답을 이어갈 때도 근육의 긴장을 놓지 않았다.
“옷 입는 재미를 알게 된 것 같아요. 그 전에는 배우가 그냥 우리 보통사람 같으면 되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어요. 한재호를 만나면서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잘 맞는 옷이 됐어요. 서울에서도 조끼까지 갖춰 입은 정장 차림으로 다닌다니까요 (당분간 멋진 이미지를 유지하라는 기자의 주문에) 어떡하죠? 바로 다음 영화부터 다시 구겨지는데, 으하하하.”
“사실 배우들 연기 다 좋죠. 변 감독을 비롯해서 촬영감독, 조명감독, 미술감독까지 다 잘해서 그래요. 사실 ‘불한당’ 팀에 베테랑 제작진 없어요. 그런데 정말 한 장면 한 장면 만화책 만들 듯 콘티를 만들고, 자기들끼리 의견 일치 볼 때까지 싸우듯 토론하고, 배우들한테 칠판에 써가며 장면들을 설명하고 촬영에 들어갔어요. 편집도 너무 잘해 주셨고…, 그런 젊은 피들의 노력이 ‘불한당’을 만든 거예요. 그 점이 관객 분들께 잘 전달됐으면 좋겠어요.”
◇ 김희원 “칸이 큰 공부가 됐다”
배우끼리 칸에 와서도 SNS 논란에 대한 자숙의 의미로 함께하지 못한 감독과 젊은 제작진의 열의를 전하기 위해 애쓰는 배우들의 모습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또 하나 그들의 공통된 얘기는 “칸이 많은 공부가 되고 자극이 됐다”는 것이었다.
설경구는 “내 안의 무언가가 살아나고 자극을 받은 느낌”이라며 “칸의 메인극장 뤼미에르에서의 상영이 주는 자극은 남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전혜진은 “칸의 맛을 알아버렸다”며 “배우이기도 하지만 밥해 먹고 애 키우는 엄마이기도 하니까, 한국영화에서의 여배우 입지가 넓지 않다 보니까 좀 의기소침한 부분이 있었는데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지 않더라도 더 버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김희원의 말에 기자들이 숙연해졌다.
“제가 주연이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과하지 않게 연기하려는 생각을 해왔던 것 같아요. 악하지만 웃기고, 웃지만 무서운 이중 노출의 제 포지션만 잘 가져가자, 스스로 눌렀던 것 같아요. 그런데 ‘불한당’을 보는 해외 관객들의 반응을 보면서, 자막이 있다 해도 그 뜻이 100퍼센트 전달되는 건 아니다. 그렇다면 설사 자막이 없더라도 적어도 저 인물의 감정만큼은 제대로 전해지도록 앞으로는 표정 하나부터 손짓, 몸짓 하나를 디테일하게 연기하자 생각했습니다. 칸이 큰 공부가 되네요.”
◇ “미장센, 카메라 기술과 색감은 훌륭한 예술적 성취”
해외 언론의 호평도 이어지고 있다. 매일 발간되는 칸영화제 공식 소식지, 스크린인터내셔널이 “훌륭한 예술적 성취와 섬세한 미장센”을 추켜세우며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무간도’ 류의 1980년대 홍콩 느와르 영화의 흔적도 보이지만 현란한 카메라 기술과 시제에 따라 변화하는 색감은 최상의 수준”이라고 극찬했다. 영화 전문매체, 스크린 아나키는 “감독의 깔끔한 손재주가 액션을 날카롭고 흥미롭게 꾸며 놓았다”고 호평하면서 “재호 역의 설경구는 배우 특유의 불확실성과 약한 모습을 통해 캐릭터 자체가 지닌 허세의 강약을 조절, 보는 즐거움이 있다. ‘불한당’은 임시완의 타고난 스크린 카리스마를 새롭게 선보이는 작품”이라며 배우에도 관심을 보였다. 빡빡한 일정에 쉽지 않았지만 “시완아, 칸은 가 볼 만해. 형이랑 같이 가자”고 권하는 설경구의 말에 참석했다가 MBC 드라마 ‘왕은 사랑한다’ 촬영을 위해 급히 돌아간 임시완에게 전하고 싶은 평가다.
◇ ‘불한당’ 역주행, 관객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70년의 역사 속에 명실상부하게 세계 최고의 영화제로 자리 잡은 칸국제영화제에서 관객과 평단의 고른 호응과 호평을 받고 있는 ‘불한당’. 작품 자체가 지닌 커다란 미덕과 배우들의 매력 넘치는 호연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변성현 감독 발 SNS 논란으로 기대 이하의 성적표를 받고 있다. 감독과 배우에게는 세계 128개국에 판매되는 성과 이상으로 한국 관객들의 사랑이 큰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아니, 열망한다.
칸에서의 희소식에 영화에 대한 댓글 분위기도 호전되고 예매율도 6위로 조금 올라서고는 있지만, 관객 80만 명에 못 미치고 있는 ‘불한당’이 100만의 문턱을 넘어 그 이상까지 역주행하려면 보다 큰 관객들의 사랑이 필요하다. 극장주들이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 ‘원더우먼’에게 전폭적으로 내 주는 상영관을 조금이라도 얻으려면 말이다. ‘불한당’ 역주행의 역사는 관객의 힘에 달려 있다.
/fnstar@fnnews.com 칸(프랑스)=fn스타 홍종선 기자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