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태웅은 분명히 탄탄하고 안정적인 연기력을 지녔으나 흔히 말하는 ‘국민 배우’는 아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국민에게 애정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 하지만 오직 연기로만 평하자면, ‘포크레인’ 속 김강일을 연기할 배우로 엄태웅의 대체제는 없어 보인다.
‘포크레인’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위 진압에 동원됐던 공수부대원 김강일(엄태웅 분)이 퇴역 후 포크레인 운전사로 살아가던 중,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20여 년 전 묻어두었던 불편한 진실을 좇아가는 진실 추적 드라마로 김기덕 감독이 각본을 쓰고 이주형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영화 ‘붉은 가족’을 통해 김기덕 감독의 독창적인 소재에 자신만의 재기 발랄한 연출을 접목시킨 이주형 감독은 ‘포크레인’으로 김기덕 감독과 두 번째 협업을 이룬 것. 그들은 시선을 비틀어 ‘가해자’로 불리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시위 진압군들을 재조명하며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상처를 다루며 5.18의 또 다른 이면을 바라보게 만든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과거 한국의 참혹함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건이며 동시에 한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을 그었기에 수십 년이 지나도 국민들에게 있어선 기억해야만 할 이야기고, 뼈아픈 역사다. 여전히 우리들은 광주 시민들과 함께 아파하고 위로한다. 그런 가운데, ‘가해자’라고 불리는 시위 진압군의 시선에서 그들의 삶을 따라가고 ‘피해자’로 투영하는 건 민감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이 민감한 이야기에 배우마저 아주 민감하고 파격적이다. 그 주인공은 지난해 11월 성매매 혐의에 휩싸였던 엄태웅. 심지어 ‘포크레인’의 촬영 시기는 해당 논란이 일었던 시기와 맞물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본을 쓴 김기덕 감독과 이주형 감독은 과감하게 그를 선택했다.
대단한 리스크를 감수하고 캐스팅한 두 사람에게 부응하듯, 엄태웅은 충분한 열연을 펼친다. 그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위 진압에 동원됐던 공수부대원 김강일 역을 맡아 작품의 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낸다.
김강일은 퇴역 후 포크레인 운전사로 살아가던 중 굴삭 작업을 하다가 깊숙이 묻혀 있던 백골을 발견한다. 악몽에 시달리던 그는 불현듯 20년 전 그날, 자신이 그 곳에 가야만 했던 이유를 묻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북이마냥 무거운 포크레인과 함께 자신과 함께 잔인한 역사 속에 있었던 자들을 찾아 나선다.
실제로 엄태웅의 대사는 그렇게 많지 않다. 불편한 진실을 좇아가면서 만난 군대 동기들과 상사들 앞에서도 입을 열지 않는다. 오로지 일렁이는 눈빛과 숨소리로 감정을 대신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힌다.
연민과 분노가 뒤엉킨 감정이 그의 표정을 지배한다. 또한 가슴 속에 응어리를 가득 쥐고 있지만 그것을 폭발시키지 않고 턱 끝에 가까스로 삼키고 있음이 온전히 느껴진다. 느리고 삐걱거리고 거친 궤도를 만드는 포크레인에 올라서있는 그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김강일의 한은 후반부로 갈수록 증폭된다. 그리고 동시에 함께 분출해낸다. “왜 우리를 그 곳에 보냈습니까”를 반복적으로 외치는 그는 더없이 처절하다. 악다구니를 내뱉듯 상사들 앞에서 관등성명을 외칠 땐, 초반엔 엄태웅의 발성이 워낙 거칠어 당혹스러운 부분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강일이 지닌 상처의 크기를 발견할수록 목소리의 거친 질감은 꽁꽁 감춰놓은 고통을 읽어내는 데에 꽤나 괜찮은 효과를 보인다.
이주형 감독은 “포크레인의 비어있는 좌석을 보면서 모든 배우를 매치해봤다. 이 영화의 특징상 제가 원하는 배우는 엄태웅 밖에 없었다. 꽂혔다. 좋은 다른 배우들이 앉아도 이상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또한 표현을 많이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내공을 가지고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길 바랐다. 그런 저의 생각이 맞았다”고 신뢰를 드러냈다.
물론 그의 연기가 아무리 경지에 도달했다고 하여 그가 저지른 잘못이 희석되어서는 안 된다. 결코 옹호해서도 안 된다. 다만 작품 속에서 자신은 내려놓은 채, 열연을 펼친 건 확실한 그가 대중의 마음을 흔들지 귀추가 주목된다.
/9009055_star@fnnews.com fn스타 이예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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