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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민의 채권포커스] 前 일본은행 총재의 물가안정목표제 비판

[장태민의 채권포커스] 前 일본은행 총재의 물가안정목표제 비판
사진=한국은행, 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일본은행 총재



이달 4~5일 서울 조선호텔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은행 국제 컨퍼런스의 주제는 '통화정책의 역할: 현재와 미래'다.

통화정책 목표와 수단, 평판과 커뮤니케이션, 정책 조합, 중앙은행의 미래 등에 대한 참가자들의 연설과 논문 발표 등이 이어지고 있다.

2008년 4월부터 2013년 3월까지 일본 중앙은행을 이끌었던 시라카와 마사아키 전 일본은행 총재는 물가안정목표제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내면서 주목을 받았다.

물가안정목표제는 중앙은행이 일정기간 또는 중장기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물가목표치를 미리 제시하고 이에 맞춰서 통화정책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중앙은행이 금리결정을 할 때 물가를 가장 중시하는 시스템이다.

물가안정목표제는 1990년 뉴질랜드가 가장 먼저 도입했으며 이후 각국으로 퍼져 가장 대중적인 통화정책 방식이 됐다. 한국은 1998년부터 물가안정목표제를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 前 일본은행 총재, 물가안정목표제에 대해 문제제기
오랜 기간 물가안정목표제는 별 문제가 없는 것으로 인식됐다. 인플레이션 전망 등에 따라 금리를 조절하면서 경기변동을 축소하고 물가를 안정시켜 안정적인 경제 성장에 기여하는 시스템으로 평가 받곤 했다. 금리 결정에 있어서 인플레이션 문제는 가장 중요하다는 게 당연한 것처럼 인식되기도 했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그러나 이 같은 인식에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물가안정목표제는 성공적인 통화정책 체계로 평가됐고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통화정책의 개별적 실패사례로 인식됐다"면서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금융안정 문제가 부각되면서 도전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물가안정에 중점을 두는 통화정책이 물가를 안정시킬 수는 있으나 다른 부작용을 방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게 전 일본은행 수장의 메시지였다.

그는 "물가안정목표제가 거시경제안정을 보장하지는 못했다"면서 "지난 30년간 주요 경제위기를 초래한 것은 부채와 높은 자산가격으로 특징 지어지는 금융불균형이었다"고 말했다.

경제 위기의 주범은 부채나 부동산 버블 등이었지만, 중앙은행이 지나치게 물가안정에만 천착한 것 아니냐는 일갈로 보였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중앙은행이 '금융안정' 문제에 소극적이었던 이유로 △ 금융안정을 측정하기 어렵다는 점 △ 복수의 정책수단이 필요하다는 점 △ 다른 기관(예컨대 정부)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점 등을 거론했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금융안정 문제는 중앙은행의 독립성과 설명책임이라는 정책 가버넌스 측면에서 물가안정만큼 용이하게 접근하기 어려운 목표였다"고 평가했다.

■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의 부딪힘
시라카와 총재는 앞으로 물가안정과 금융안정 문제가 서로 부딪히는 일이 빈번할 수 있다고 봤다.

이런 지적은 물가상승률이 낮아 저금리 기조를 유지한 뒤 빠른 속도로 가계부채를 쌓은 한국과 같은 나라에도 해당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잠재성장률 하락과 장기간의 완화적 통화정책 유지는 부채 누증이라는 부담을 가져 온다"면서 "향후 물가안정과 금융안정 간 상충관계가 더욱 심각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고객 맞춤형의 다양한 신상품 개발 등으로 정확한 인플레이션 측정이 보다 어려워질 것으로 봤다.

또 국제화된 환경에선 자국요인만 보고 통화정책을 펴기도 어려울 것으로 봤다.

시라카와 전 총재는 "국제금융환경과 같은 대외요인이 개별국 통화정책 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이 확대될 수 있고 통화정책과 국내 정책목표간 대응관계 약화의 문제도 대두될 수 있다"고 밝혔다.

■ 큰 폭 금리 인상 기대하기 힘든 한국 중앙은행의 현실 인식
시라카와 전 일본총재의 목소리는 통화정책 과정에서 물가에만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라는 조언으로 읽힌다. 저금리가 오랜 기간 지속되면 가계부채 급증 등 금융불균형이 커지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많은 중앙은행가들에게 물가 압력의 정도는 여전히 가장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주요국 물가상승률이 중앙은행의 목표를 밑도는 경우들이 많았으며, 이런 고민들은 계속되고 있다. 글로벌 경기 상승 흐름이 이어지고 있지만 과거와 같은 다이나믹한 통화정책적 대응은 힘들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국의 일반인들은 정부기관이나 중앙은행이 발표하는 '낮은 물가 상승률'에 대해 믿지 않지만, 중앙은행가들은 저물가 때문에 금리를 올리기 만만치 않다는 인식을 드러내곤 했다.

그간 금융가 등에선 금융위기 이후 필립스 곡선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을 많이 했다. 필립스 곡선은 실업률과 임금상승률 사이에 안정적인 관계가 있음을 나타내는 모델이다. 예컨대 실업률이 낮을수록 임금상승률(물가상승률)이 높게 나타난다는 이론이다. 실업자가 줄어들면 사람들의 몸값이 올라가는 게 당연해 보였지만, 위기 이후 이런 그림이 매끄럽게 그려지지 않았다.

그 동안 경기가 좋아져 실업률이 낮아지는데도 물가는 예상만큼 오르지 못하는 현상에 대해 중앙은행가들은 머리를 긁어댔다. 이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주열 총재는 이날 컨퍼런스에서 통화정책 과제와 관련, "금융위기 이전엔 경기회복과 함께 실업률이 하락하면 인플레이션이 상승하는, 즉 필립스 곡선의 우하향 경향이 뚜렷했다"면서 "하지만 위기 이후 이런 상관관계에 의문이 생기면서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운용에 어려움이 커졌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소비자물가 물가상승률은 1%대 초·중반 수준으로 중기목표(2.0%)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일반인들은 물가가 높아서 아우성을 치기도 하지만, 중앙은행가들이 볼 때는 금리를 올릴 만큼 물가가 오르지 않은 것이다.

이런 가운데 최근엔 한국은행에게 고용을 중시하라는 외부의 목소리도 얹혔다. 한국은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드는 추세에 접어든 상태이며, 무엇보다 인구고령화가 급속히 이뤄지고 있다. 이런 구도에선 향후 고용이 급격히 늘어나거나 경기가 고성장을 구가하기 만만치 않다. 금리를 올리는 데도 한계가 있다.

이미 한국에선 중립금리가 많이 낮아져 있다는 인식도 강하다. 이론상으로 존재하는 중립금리는 경제가 인플레이션이나 디플레이션 압력이 없이 잠재성장률 수준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금리다.

빠른 속도로 노쇠한 한국경제에선 3% 성장, 2% 물가를 현실적으로 '활력 있는' 경제상태로 볼 수 있다는 진단들도 많다. 아무튼 중앙은행가들은 이런 점 때문에 과거처럼 금리를 많이 올리기 어려울 수 있다.
동시에 금리 인하를 경기부양책으로 적극적으로 쓰는 데도 한계가 있다.

이주열 총재는 "중립금리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보다 상당 폭 낮아진 것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다"면서 "중립금리가 낮아지게 되면 경기가 하강국면에 진입했을 때 정책금리를 인하할 여지가 줄어든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렇게 되면 정책금리가 하한에 도달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경기변동에 충분히 대응하기 어렵게 된다"면서 "중립금리는 인구고령화, 생산성저하, 안전자산 선호 경향 등 주로 장기 추세적 요인으로 인해 낮아진 것으로 보여 앞으로도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했다.

taeminchang@fnnews.com 장태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