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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감독 "극장에 작품 못걸리는게 이렇게 뼈아플줄 몰랐다"

영화 아가씨 이후 드라마로 찾아온 박찬욱 감독
존 르 카레의 소설 원작으로 한 英드라마 '리틀 드러머 걸' 연출
OTT 왓챠플레이서 감독판 공개
영어로 시도한 특유의 '말맛'과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가 포인트
"TV 시리즈에 거부감 없지만 극장상영 안되는 것은 큰 희생"

박찬욱 감독 "극장에 작품 못걸리는게 이렇게 뼈아플줄 몰랐다"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다 가질 수는 없는 거니까."

박찬욱 감독(56)이 예의 차분한 말투로 이런 말을 내뱉자, 아주 잠깐, 인간적인 동질감이 들었다. 각자 상황은 달라도, 사는 건 비슷한가. 박찬욱 감독이 '아가씨'(2016) 이후 3년 만에 신작을 들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영화가 아닌 드라마다. 지난해 영국 BBC와 미국 AMC에서 방영된 미니 시리즈 '리틀 드러머 걸'의 감독판을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왓챠플레이를 통해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박 감독이 '뜻대로 되는 게 없다'라고 대답한 건 차기작 질문을 받았을 때다. 그는 "한국영화와 외국영화를 번갈아가며 1편씩 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다. 최근 할리우드에서 서부극을 찍는다고 보도됐지만 "아직 투자가 확정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이번 작업에 대한 '치명적'인 아쉬움도 드러냈다. 그는 원작인 존 르 카레의 동명 소설이 워낙 방대해 영화보다 미니 시리즈가 적절하다고 판단, 첫 드라마 연출에 도전했다. 작업 자체도 흥미로웠지만, 극장에서 자신의 작품을 못 보는 게 이렇게 뼈아플지 몰랐단다.

"런던영화제에서 드라마 1·2화가 최초 공개된 적 있는데, 그때 대형 스크린에서 작품을 보고 저도 깜짝 놀란 거죠. 요즘은 TV 드라마도 영화처럼 공들여 찍거든요. 그런데 이 작품을 극장서 못 본다고 생각하니 너무 슬펐습니다." 최근 왓챠플레이 유저를 상대로 6편 전편을 극장 상영하는 이벤트를 한 것도 이 때문이다. "TV 시리즈나 OTT 작품에 대한 거부감은 없습니다. 다만 이번에 무슨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게 됐으니 앞으로는 연출작을 결정할 때 영화가 아닐 경우, 극장 상영을 희생할 가치가 있는지 꼭 따져볼 생각입니다."

창작자 입장에서 관객의 취향과 접점을 찾는 것도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다. "관객 몇 백만명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요? 설사 흥행 공식이 있다 해도 감독인 내가 그 공식대로 찍고 싶지 않다면? 억지로 연출해서는 좋은 결과가 나온다고 믿지 않아요."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봐도 그렇단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와 '아가씨'가 흥행이 잘됐는데, 계산속으로 한 게 아닙니다. '올드보이'(2003)는 제 영화 중 가장 대담해요. 금기를 다룬 내용이나, 형식적으로 특이한 게 많지만, 저를 가장 유명하게 만들었죠. 뜻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무작정 대중성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결과는, 성공적이다. 활동 영역이 영미권으로 넓혀지면서 자연스레 관객층이 두터워졌다.

"한국 영화가 해외에 소개되면 자막 영화라는 이유로 아트하우스에서만 상영됩니다. 마이너리티에서 벗어나서 일반적인 영화 애호가에게 접근한다는 건 매력적인 일이죠."
박찬욱 감독 "극장에 작품 못걸리는게 이렇게 뼈아플줄 몰랐다"
'리틀 드러머 걸:감독판' 왓챠플레이 제공


'리틀 드러머 걸'은 1979년 이스라엘 정보국의 비밀 작전에 연루돼 스파이가 된 무명배우 찰리(플로렌스 퓨)와 그를 둘러싼 비밀 요원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촬영 현장에서 한국 스태프는 김우형 촬영감독을 비롯해 3명뿐이었고 4~5개월간 81회차로 영국·그리스·체코를 오가며 바쁘게 찍었다. "예산에 맞춰 촬영 회차가 정해져 있어 몇 개의 장면을 포기해야 했죠. 고민하다 몇 신 없애고, 꼭 하고 싶은 건 어떻게든 맞추겠다고 고집했어요." 촬영해 놓고도 방송 당시 심의기준과 상영시간 제한 때문에 절충한 부분이 있다. 이번 감독판은 오로지 박 감독의 연출 의도에 따라 편집된 최종본으로, 방송 당시 빠진 여러 장면도 포함됐다.

박 감독 특유의 화려한 색채 감각과 곧 마블 영화에 출연할 여주인공 '플로렌스 퓨'의 매력이 볼거리다. 박 감독이 영어 작품에서 처음 시도한 '말맛'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첫 영어 영화 '스토커'(2013)를 찍을 때만 해도 대사를 가급적 줄였지만 이번에는 대사가 많다. "그 말도 재미있게 돌려 말하거나 음흉하게 표현하고, 이상한 유머를 구사하는 식이죠. 한국어로 써서, 번역하고, 감수하는 과정을 거쳤는데 많은 대사를 만들고, 배우들에게 연기 가이드하고, 그런 과정을 즐길 수 있게 된 게 저로서는 큰 성취입니다."

도발적 매력의 여성이 무모한 모험에 뛰어드는 것도 박 감독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는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영화를 즐겨 찍는 이유로 "인류의 절반이 여성"이기 때문이란다. "여성 주인공 영화가 상대적으로 적죠. 인류의 절반이 여성이니 훌륭한 시장입니다. 개인적으로 아이도 하나뿐인데 딸이라서 환경적 영향도 받았습니다.
" '리틀 드러머 걸' 원작을 추천한 이도 박 감독의 아내다.

박 감독은 자신 영화의 주인공처럼 "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는 데 있어 주저함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첫 드라마 연출 제의를 받고 "영화와 뭐가 다르겠느냐"며 두려움 없이 수락했다는데, 도전적인 삶의 태도 덕분인지,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받아들인 '지천명' 감독의 여유 때문인지, 어째 몇 년 전보다 더 젊어보였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