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승전지 찾아 떠나는 항일여행
강구안 거북선부터 한려수도까지..통영서 되짚어보는 한산도대첩
통제영 12공방선 전통문화 체험도
진주성 지휘하던 '촉석루', 논개가 적장 안고 몸던진 '의암'.. 진주에서 만나는 조선의 기개
진주 검무
통제영 12공방에서 여행객들이 통영 나전칠기 제작 체험을 하고 있다.
통영 미륵산에서 바라본 한려수도의 비경
통영 강구안에 정박해있는 거북선
진주성 촉성문
의기 논개가 왜장과 함께 몸을 던졌던 의암
【 진주·통영(경남)=조용철 기자】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심사우대국)에서 제외하면서 한일 갈등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또 일본 국제 예술제에서 '평화의 소녀상' 전시가 중단되면서 한일 갈등은 문화 분야 등 전방위로 한층 고조되고 있다. 한 달째 이어지고 있는 일본 제품 불매운동도 유통계 전방위로 확산되고 있다. 이처럼 한일 갈등이 첨예화되면서 올 휴가는 과거 선조들이 일본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승전지를 찾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과 함께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과 한산도대첩의 승전지를 찾아갔다. 진주대첩은 바다에서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에 이어 조선군이 육지에서 거둔 최초의 대승으로 기록되고 있다.
1592년 4월에 조선을 침략해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부산진과 동래성을 장악한 뒤 순식간에 한양까지 진격했다. 전쟁 대비를 하지 못했던 조선군은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신립이 이끄는 결사대가 탄금대에서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일본군에 패한 뒤엔 한양마저 일본군의 손에 넘어갔다. 불과 20여 일 만의 일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의 14대 임금인 선조는 평양성을 거쳐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 했다.
하지만 이때 한반도 남쪽 바다에서 승리 소식이 전해졌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옥포, 당포, 당항포, 율포 등지에서 일본 수군을 물리쳤던 것이다. 일본은 육지와 달리 바다에서 거듭 패하자 병력과 함선을 한데 모아 조선 수군을 공격했다. 이에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 앞바다가 싸움에서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일본 수군을 그곳으로 유인했다. 그러고는 일본 수군이 한산도 앞바다에 나타나자 조선 수군은 함선을 학의 날개 모양으로 펼친 뒤 함포 공격을 퍼부었다. 돌격선인 거북선은 혼란에 빠진 일본 수군의 진영을 휘저었다. 일본 수군은 조선 수군의 거센 공격에 우왕좌왕하다가 47척의 배가 바다에 침몰되고 12척을 빼앗긴 채 물러나고 말았다.
패배한 일본군은 앞으로 이순신 함대와는 싸움을 피하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엄명을 받았다. 이 명령에 따라 철저히 조선함대와는 정면 대결을 피했다. 그리고 조선 수군을 만나면 빠른 속도로 후퇴하거나 거세게 추격해오면 함선을 버리고 육지로 피신해 버렸다.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 수군 중 최강의 전투력을 보유한 정규군과의 전면전이었다. 한산도 대첩은 임진왜란 초기 육전에서의 승리로 의기양양 하던 일본군의 기세를 여지없이 꺾음으로서 일본군이 더 이상 그들의 작전대로 전쟁을 수행하지 못하게 만든 해전이었다. 육지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던 일본군의 기세가 크게 꺾였고 조선은 다시금 대열을 정비해 일본과 맞설 수 있었다.
통제영은 삼도수군 통제영의 약칭으로 삼도수군 통제사가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지휘·통할하던 본영을 이른다. 선조 25년인 1592년, 임진왜란이 연전연패하던 육군과는 달리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의 함대는 연전연승해 일본군의 소위 '수륙병진작전'을 무산시킴으로써 존망의 위기에 처해 있던 나라를 구한다.
이에 선조는 이듬해에 당시 직제에도 없던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함을 만들어 이순신 장군에게 내리고 장군으로 하여근 삼도수군을 통할하게 한다. 초대 통제사로 제수된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다 새로이 진영을 개설하고 장기전에 임했다. 이때의 한산진영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세병관은 제 6대 통제사 이경준이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겨온 1604년에 창건한 객사로 통제영의 상징적 건물이다. 이후 이경준은 전국의 공인들을 불러들여 공방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통제영 내 12공방의 시작이다. 12공방 곳곳에선 장인들과 함께 전통문화 공예 체험을 할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의 수군에 패해 바닷길을 통한 병력 수송과 물자 보급을 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육지를 통해 전라도를 장악할 목적으로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진주성을 공격하기로 한다. 진주성의 조선군은 성벽을 수리하고 해자를 깊이 파는 등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했고 성 밖에서는 의병 부대가 지원했다.
마침내 1592년 10월 초, 하세가와와 나가오카 등이 이끄는 3만여 명의 일본군은 진주성을 총공격했다. 진주 목사 김시민이 지휘하는 수천 명의 조선군은 백성들과 힘을 합쳐 성을 방어했다. 이들은 활과 총통뿐 아니라 무기가 될 만한 것은 무엇이든 이용해 결사적으로 맞섰다.
"성안에 기와와 돌, 초가지붕, 나무 등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 전투가 마무리될 즈음 김시민은 일본군의 총격을 받고 죽었지만 곤양 군수 이광악이 그를 대신해 전투를 지휘했다. 결국 6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은 진주성 공격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진주성 전투의 패배로 인해 일본군은 더 이상 서쪽으로 진격하지 못했다. 하지만 다음해 6월 일본군 4만명이 다시 진주성을 공격했고, 의병장 김천일과 경상우병사 최병회 등이 이끄는 민관군 7만명이 성을 지키다 끝내 죽임을 당한다. 진주성이 함락되자 일본군은 촉석루에 올라 전승 축하연을 벌였다.
이때 기생 논개는 그들의 여흥을 돕다가 일본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시퍼런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진주성에 들어섰다. 남쪽 벼랑 위에 촉석루가 우뚝 솟아 있다. 촉석루는 전시엔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엔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로 사용되거나 과거를 치르는 고사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촉석루 앞에 가보니 진주검무가 펼쳐지고 있었다. 진주검무는 8명의 무희가 춘다고 해서 진주팔검무라고도 한다.
진주검무의 처음은 칠색갑사로 된 색동한삼을 양손에 낀 한삼 평사위로 시작된다. 맨손 입사위로 이어지다가 본격적인 검무라고 할 수 있는 칼을 사용한 칼사위로 마무리하게 된다. 촉석루 바로 옆에는 논개의 충절을 기리는 '의기사'가 있으며 촉석루 아래 암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가면 논개가 적장을 뛰어든 '의암'이라는 바위와 만난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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