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언덕' 박석영 감독 인터뷰
'들꽃' '스틸 플라워' '재꽃' 꽃 3부작 연출
영화 바람의 언덕 포스터(영화사 삼순 제공) /사진=fnDB
박석영 감독(영화사 삼순 제공) /사진=fnDB
[파이낸셜뉴스] “아프리카에서 찍고 싶었던 네 번째 영화가 계속 엎어지면서 인생이 엉망이 됐어요. 우울증에 자살할거 같았고, 어머니께 처음으로 힘들다고 고백했죠. 그때 엄마가 제 손을 붙들고 산책을 다녔어요. 쌈짓돈 2천5백만 원도 내줬죠. (40대 후반의 아들은) 본때 없이 그걸 냉큼 받아서 아무런 연고도 없는 강원도 태백에서 시나리오를 쓴 거죠.”
■ '꽃' 3부작, 박석영 감독의 네번째 장편영화 '바람의 언덕'
그렇게 만든 영화가 딸을 버린 죄 많은 엄마 영분(정은경)과 고아원에서 외롭게 자란 딸 한희(장선)의 이야기를 그린 ‘바람의 언덕’이다. 10대 가출소녀의 거리의 삶(‘들꽃’·2014)부터 가혹한 노동환경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소녀의 홀로서기(‘스틸 플라워’·2015), 그리고 외롭고 의지할 데 없던 두 소녀의 연대를 그린 ‘재꽃’(2016)까지 꽃 3부작을 연출한 박석영 감독의 신작이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바람의 언덕’은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에 공식 초청돼 호평 받았다.
“엄마가 ‘관객들이 쉽게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보라’고 조언하셨죠. 태백은 아는 사람이 전혀 없는 도시인데, 그냥 모르는 곳에선 편견 없이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죠.” 폐광도시라 인적 드문 그곳에서 감독은 ‘밤에 전단지를 붙이는데 왠지 표정이 밝은 아줌마’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마치 아들의 영화가 개봉할 때면 늘 거리로 직접 홍보하러 다녔던 자신의 엄마처럼.
“엄마 이름이 정삼순인데요(이 영화의 제작사 이름이 영화사 삼순이다). 영분이 전단지를 붙이는 것 말고는 엄마와 닮은 구석이 전혀 없어요. 영분의 삶은, 너무 이른 나이에 결혼해 엄마, 아내, 며느리의 역할에 갇혀 살아온 우리 엄마와 너무나 다르죠. 오히려 한곳에 정착 못하고 여기저기를 떠돈 영분이 저 같고, 한희가 엄마 같아요.”
■ "서로의 진심을 밝히며 독립된 개인으로 함께 서길 바랐죠"
영화는 남편과 사별한 영분이 강원도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정체를 숨긴 채 딸의 필라테스 학원에 등록한 그는 우연한 계기로 정체가 탄로 난다. 딸은 서둘러 도망가는 엄마를 쫒아가 “원망하지 않는다”며 붙잡는다. “엄마는 지금의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되지 않았느냐”며 엄마의 상황을 이해하는 말도 던진다. 엄마는 그런 딸에게 오히려 “난 네가 싫다”며 모진 말을 던지고 달아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쫓아온 딸에게 “무섭다”고 고백한다.
딸 역시 “무섭다”고 답하는 이 장면은 관객들에게도 묘한 위로를 전한다. 누구에게나 경중은 다를지언정 삶은 녹록치 않고, 때로는 누구에게도 터놓지 못한 채 ‘마음의 극지’를 견뎌낸다. 어둠이 짙어지면 호흡곤란에 시달리는 한희처럼, 허름한 여관방에서 딸의 사진을 보며 울음을 삼키는 영분처럼. 영화를 완벽하게 마무리한 이 대사는 어떻게 나온 걸까?
“둘이 나누는 가장 진실한 한마디라고 생각했어요. 그 말은 그동안 제가 찍었던 영화의 모든 인물이 하고 싶었던, 가장 깊은 속내이자 영혼의 말이 아닌가. 마지막 순간에, 두 배우가 연기할 때, 그들을 짓누르던 많은 표정들에서 벗어났다고 봤어요. 한희는 (마치 자신의 감정을 감추는 가면과 같았던) 늘 웃는 모습에 벗어났고, 영분은 제대로 숨을 쉬게 된 거죠. 저 역시 이 영화를 찍고, (절망의 밑바닥에서 벗어나) 편히 숨을 쉬게 됐어요.”
그는 영분과 한희가 모녀가 아니라 독립된 개인으로 함께 서길 바랐다. “전 두 사람이 자신들을 옥죄던 무엇에서 풀어나길 바랐어요. 그것이 아이를 버렸다는 죄책감이건,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 모녀 관계이건. 인간 대 인간으로서,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거죠.”
‘바람난 언덕’에는 죽음의 그림자도 어른거린다. 영화는 영분의 남편이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시작되며, 도시는 황혼의 노인 마냥 쇠락한 상태다. 그곳에서 영분은 죽은 남편과 이름이 같은, 택시운전사 윤식을 만난다.
“이 영화를 찍기 전, 당시 제 삶엔 죽음이 드리워져 있었죠. 자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절교한 친구들이 꿈에 나오기도 했어요. 그들과 응어리도 못 풀고 죽으면 어떡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죠. 영분과 한희가 마음의 진심을 털어놓는데, 저 역시 제 삶을 돌아보며 스스로 진솔하고 싶은 시점에 이 영화를 하게 됐죠.”
박석영 감독의 꽃 3부작 /사진=fnDB
■ "행복하게 찍고 고통스런 마무리가 싫어서 관객 직접 찾아가 만났어요."
‘바람의 언덕’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뒤 4월 23일 개봉 전까지 전국을 돌며 작은 상영회를 가졌다. '커뮤니티 시네마 로드쇼' 상영 방식을 통해 지역의 영화 커뮤니티와 독립예술영화관에서 다양한 관객과 만났다.
“부산영화제에서 GV를 하다가 특이하다고 느꼈어요. 제 전작들과 달리 관객들이 영화가 아니라 이 영화를 매개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죠. 그래서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관객을 만나고 싶었죠. 또 개봉 후 느끼는 열패감, 헛헛함을 덜어보고 싶었어요.”
몇 년에 한번 씩 나오는 ‘뜻밖의 흥행작’을 제하면 대다수의 독립영화가 소리 소문 없이 개봉했다 사라진다. “창작자 입장에서는 그걸 지켜보는 일이 고통스러워요. 행복하게 뭔가 기획해서 행복하게 찍지만, 고통스럽게 마무리되는 거죠.”
‘바람의 언덕’은 개봉 전 석 달간 약 850명의 관객을 만났다. 기억에 남는 관객 반응을 물었다.
“한 할머니가 ‘영분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비난했죠. 어떻게 자식을 버릴 수 있냐고. 알고 보니 본인이 미혼모로 자식을 홀로 키우셨더라고요. 아버지께 버림받았다는 한 청년은, 한희가 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을 때 버림을 받아서 자신의 엄마를 용서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자신은 아버지에 대한 나쁜 기억을 갖고 있어 절대 용서못한대요. 한 중년의 어머니는, 아들이 옆에 있는데도 자신도 정말 사는 게 무섭고 두려웠다며, 영분의 마지막 대사에 공감이 간다고 하셨죠.”
“상영 후 2시간 넘게 관객들과 깊은 이야기를 나눴죠. 그 과정이 전 국민을 대상으로 영화제를 한 기분이랄까요. 마치 한 사람을 깊게 이해하게 된 기분이랄까요. 개봉 후 성적과 무관하게, 지금까지의 만남만으로 전작들과 달리 헛헛함이 없어요.”
■ 여성 주인공 영화 찍게 된 이유 "홍대 거리서 병 깨던 10대 소녀"
박석영 감독은 한때 극중 결혼과 이혼을 몇 차례 반복한 영분처럼 정착할 곳을 찾지 못한 채 부초와 같은 삶을 살았다. 대학 재학 시 우연히 가입한 연극동아리에서 학생운동을 하게 됐고, 제적을 당하면서 20대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하지만 IMF 금융위기로 영화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오가는 생활이 이어졌고, 결국 학위도 따지 못한 채 30대 후반에 귀국길에 올랐다. “인생의 일부가 통으로 날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학선배인 전계수 영화감독이 낙심하고 있던 그에게 손을 내밀어줘 ‘뭘 또 그렇게까지’(2010) 연출부에서 잠깐 일했다. 이후 전감독이 시놉시스를 주며 시나리오를 써보라고 제안했고 석 달간 매달려 탈고, 수정한 뒤 영화사봄에 팔았다. 결국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나, 시나리오 집필에 대한 자신감을 얻는 계기가 됐다.
가출소녀의 이야기로 데뷔하게 된 이유는 무얼까? 생계를 위해 박물관의 전시품과 관련된 스토리를 쓰는 일을 하던 그는 “감독 데뷔하게 될지 몰랐다”며 40대 초 홍대에서 한 소녀를 본 기억을 떠올렸다.
“홍대에서 작고 하얀 옷을 입은 14-15살쯤 된 여자 아이가 병을 던지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됐죠. 취한 것도 아니었는데 빈병을 주워서 깨더군요. 군중들이 한 병 더, 한 병 더 외치고, 여자애가 그걸 받아서 계속 던지는 이상한 광경이었죠. 그게 제 마음 속에서 떠나지 않았죠.”
가출 청소년의 이야기를 그린 ‘들꽃’은 그렇게 세상에 나오게 됐다. ‘들꽃’으로 무언가 성이 안차 그 소녀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 ‘스틸 플라워’ ‘재꽃’을 찍었다. ‘바람의 언덕’도 독립적인 작품처럼 보이지만 전작과 연결고리가 있다. ‘재꽃’은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평범한 삶을 보내고 있는 하담(정하담)에게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아빠를 찾겠다며 자신과 꼭 닮은 열한 살 소녀, 해별(장해금)이 찾아오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재꽃’은 자신을 버린 사람과 대면하지 않고, 비슷한 처지의 두 소녀가 연대하면서 살아가죠. 반면 ‘바람의 언덕’은 나를 버린 사람을 대변해요. 만나서, 이기는 이야기죠. 내 외로운 시간을 당신을 원망하며 분노로 채우지 않고, 착한 마음으로 채웠어, 당신이 날 버렸다고 내 인생을 버리거나 망가뜨리지 않았어, 난 괜찮다, 스스로 잘 견딘 어떤 사람, 그 사람이 자신을 버린 사람을 마주한 이야기가 됐어요.” 마치 네 편의 영화가 한 소녀의 성장담으로 연결된 것이다.
■ 남성보다 여성의 삶 그리는 게 편해 "난 엄마의 삶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
데뷔작의 영감을 준 사람이 여성이지만, 남성으로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이다. 지금껏 꾸준히 영화의 주인공을 여성으로 한 이유가 있을까? 그러자 다시 엄마 이야기로 돌아왔다.
“엄마가 60대 후반인데 전 엄마의 20대부터 그녀의 삶을 지켜본 사람입니다. 가장 오랫동안 지켜본 타인의 삶이 제 엄마고,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죠. 아버지가 특별히 가부장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스무 살에 첫 아이를 낳은 엄마가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참고 지내는 것을 많이 봤어요. 내가 모르던 어머니의 모습도 본 적 있죠.”
그는 남성보다 여성의 삶을 그리는게 더 편하단다.
엄마는 아들의 영화를 어떻게 볼까? 그는 “‘들꽃’과 ‘스틸 플라워’는 너무 험한 이야기라 보지 말라고 했다”며 “‘재꽃’은 보고 아주 좋아했다. ‘바람의 언덕’보다 ‘재꽃’을 더 좋아한다”고 답했다. '바람의 언덕'은 4월 23일 개봉했다.
jashin@fnnews.com 신진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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