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 누그로호 'A Pot Full of Peace Spells'(2018년) /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거대하고 화려한 색감의 만화 일러스트 같은 걸개 그림. 정글과 꽃 속에 숨어있는 사람들은 눈만 빼꼼 내놓고 관객을 응시한다. 물감이 이리저리 흘러내린 것 같은 모습에 가까이 다가서서 보니 물감이 아니라 자수다. 인도네시아 출신의 현대미술 작가 에코 누그로호(43)가 대학을 다닐 당시 인도네시아는 정치·사회적으로 격변기를 맞이했다. 30여년간 집권했던 수하르토 정권을 몰아낸 개혁 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작가는 민주주의를 얻기 위한 혁명, 그 과정에 수반된 개인의 의지와 집단의 폭력성을 모두 경험했다. 이런 경험은 눈만 드러낸 채 정글과 꽃 사이에 숨어있는 듯한 인간의 모습으로 작품에 드러난다.
작가는 "평화는 항상 논의되는 주제이지만 실제로 지구상에 진정 평화로운 장소는 없다. 우리는 전쟁을 '조화'를 위한 전략으로 사용한다. 피부색과 이데올로기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경계하고 편을 가르는 상황 속에서 미화되었던 민주주의의 허구가 드러나기도 한다"며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사회 안에서 소란스럽게 발생하고 있는 이 모든 모순을 탐구하는 것이 최근 나의 작업이며 이를 이번 전시에 담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에코 누그로호 '로스트 인 패러디' 설치 전경 / 아라리오갤러리 제공
한편 누그로호는 지난 2007년부터 대형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한 그림이 마른 후 같은 색의 실을 사용해 그 위에 자수를 입히는 방식의 작업과 캔버스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작가는 사라져가는 인도네시아 전통 자수를 되살리기 위해 장인들과 협업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인도네시아의 신화와 우화를 바탕으로 한 전통 인형극인 '와양'의 스토리와 캐릭터를 인도네시아의 직물 염색법인 바틱이나 자수와 같은 지역적 기법과 연결시켜 독자적인 표현 방식을 구축한 작품들을 보고 있으면 한땀한땀 작업을 이어간 장인의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전시는 11월 14일까지 서울 북촌로 아라리오갤러리.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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