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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달걀·베이컨 한끼로 목동들에 안식을 선물하다 [Guideposts]

텍사스·오클라호마의 마차 요리사 켄트 롤린스
어릴적 아버지가 소몰이를 할때면
어머니는 케이크를 준비하며 말했다
"요리의 즐거움은 먹는 게 아니야
음식을 먹는 사람의 미소를 보는거지"
가족과 떨어져 말을 타는 이들을 위해
나는 한겨울 목장지대에서 요리를 한다
따뜻한 식사로 안락함을 얻길 바라며
그리고 그곁에 '누군가' 함께 하길 빈다

소박한 달걀·베이컨 한끼로 목동들에 안식을 선물하다 [Guideposts]
미국 중남부 오클라호마주 홀리스에 사는 켄트 롤린스는 집을 떠나 외지에서 일하는 목동들에게 '집밥'처럼 따뜻한 영혼의 음식을 제공한다. "목동들이 '당신 덕분에 집에 온 듯한 기분이 든다'고 할 때 가장 기쁘고 행복하다"고 그는 말했다.
소박한 달걀·베이컨 한끼로 목동들에 안식을 선물하다 [Guideposts]
텍사스주 팰로 듀로 캐니언의 12월은 말도 못하게 춥다. 새벽 3시45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취사용 마차에서 나오자 두 손과 온몸이 얼어붙는다. 북풍이 불어오고 성냥을 랜턴까지 가져가기도 어렵다. "하나님, 여기 불 좀 붙여주세요"라고 중얼거린다.

카우보이들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았지만 조만간 소란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가장 먼저 일어나서 '버사'(무게 175㎏에 나무를 때는 캠프용 난로)에 불을 지피고, 소규모 부대를 먹일 달걀과 베이컨을 충분히 준비하는 게 요리사로서 내가 할 일이다. '군대는 위장에 든 걸로 움직인다'고 사람들은 얘기한다. 소몰이도 다르지 않다. 모든 게 내게 달려 있다.

보수가 좋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포기하고 취사용 마차 요리사가 됐다. 당시에는 그게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아침이면 당연히 따뜻한 침대에 마음이 끌린다. 커피 끓일 물을 가지러 큰 통에 가보지만 꽝꽝 얼어 있다. 여과식 커피메이커에 물을 담으려면 얼음을 깨야 한다.

"주님, 제가 여기서 뭘 하는 건가요?"

바로 그때, 바람에 랜턴이 꺼지고 만다.

나는 평생 카우보이 주변에 있었다. 나는 형제 넷 중 막내였으며, 아버지는 하나님의 지구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쓸쓸한 땅인 오클라호마주 남서부에 있는 작은 목장에서 소 250마리 정도를 몰았다. 여덟 살 때 처음으로 소몰이를 나가서 무리를 16㎞ 이동시켰다. 바로 여기 같은 협곡이었고, 아직 동이 트기 전 말에 안장을 얹어서 우리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잠시 멈춰 서 아버지가 말했다.

"우리 모두 옆에 '누군가' 있다는 점을 잊지 말자. 말을 타고 가는 동안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지. 그러니 두려움에 맞서서 해내자."

그날은 길고 힘든 하루였다. 그만두고 싶은 순간들도 있었으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온몸이 쑤셨다. 그래도 그날은 좀 더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 때문에 근육통이 더 심해지기는 했지만.

그러다 또 다음 날이 되었고, 일어났을 땐 기온이 영하 15도였다. 바람이 매서웠다. 아버지와 다른 카우보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일과를 시작했지만, 어머니가 날 붙잡았다.

"우리는 초콜릿 케이크를 만드는 게 어떨까?"

밖을 한번 더 살펴보니 남자들은 추위에 맞서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나는 잽싸게 어머니에게 동의했다. 어머니는 내가 찾아야 할 재료를 일러주고, 숟가락으로 밀가루와 설탕을 퍼서 그릇에 담았다.

"얼마나 사용해야 하는지 어떻게 아세요?"

내가 물었다. 무엇을 요리하든 어머니가 조리법을 보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모든 재료는 쓰임이 있지. 함께 일하는 팀처럼 말이야. 그건 올바른 균형을 찾는 일이란다. 처음에는 실수하겠지만, 그렇게 배우는 거야."

곧 진하고 부드러운 초콜릿의 달콤한 향이 집에 가득했다. 오븐의 열기가 따스하고 아늑했다.

"이다음에는 뭔지 아니?"

"먹는 거요!"

어머니가 웃음을 터트렸다.

"치우는 일이 먼저야."

어머니는 싱크대에 뜨거운 비눗물을 가득 받았다. 음, 재미있는 일에도 힘든 일이 따르는구나.

"요리의 즐거움은 먹는 게 아니야. 사람들의 얼굴에 뜬 미소를 보는 거지."

나이를 몇 살 더 먹고 나서야 미소가 어떻게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을 이기는지 깨달았다. 열다섯 살 때 일이다. 아버지와 형, 나는 친구의 목장에서 두 팔 걷어붙이고 일을 돕고 있었다. '네이버링 업'이라고 부르는 연례 행사였다. 정오쯤, 얼굴에 구슬땀을 흘리던 나이 든 사내가 얘기하는 걸 들었다.

"오늘 좀 두둑하게 받겠는데."

'와, 현금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고 차가 줄지어 진입로에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아내들과 엄마들이 닭튀김, 빵가루를 묻혀서 튀긴 돼지고기, 온갖 샐러드, 케이크, 파이를 담은 큰 접시를 가지고 왔다. 카우보이들은 입이 귀에 걸렸다. 아침에 열심히 일하고 난 뒤 먹은 음식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지금도 기억난다. 그날 오후 카우보이들은 웃고 장난치면서 두 배 더 열심히 일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얘기한 요리를 좋아하는 이유를 떠올렸다. 사람들에게 그렇게 넉넉한 기쁨을 줄 수 있는 건 꽤 특별해 보였다. 소몰이에 필요한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남자들이 있다는 건 알았다. 어떻게 나도 그 일을 할 수 있는지 알아내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팰로 듀로 같은 소몰이 지대에 있게 되었다. 이제 랜턴에 다시 불이 붙었고, 난로가 메스키트 목재를 연료 삼아 내어주는 온정 덕분에 공기도 훈훈해졌다. 카우보이들이 커피가 담긴 컵으로 손을 녹이며 식탁 둘레에 모이자 내가 말한다.

"고개를 숙입시다.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 저희에게 주신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이 음식을 축복해 주시고 저희가 오늘 하루 나쁜 사고 없이 지낼 수 있게 살펴주십시오. 아멘."

사람들은 순식간에 먹었다. 다 먹고 나서는 모자를 약간 올리며 인사를 건넨다. "엄청 맛있었어요." 한 카우보이가 얘기해 준다. 그들이 말에 올라타자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얼핏 드러난다.

사람들이 말을 타고 떠나는 모습을 보자 조금 슬퍼진다. 아침 식사가 중요하다는 건 알지만, 무리에서 떨어지자 우울한 기분이 든다. 달걀과 베이컨을 담은 접시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처음으로 카우보이를 위한 요리를 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였다. 뉴멕시코주에서 사냥 가이드로 일하던 삼촌이 고객들을 위해 요리해 달라며 날 불렀다. 그 기회에 선뜻 달려들었다. 내가 땅에 판 구덩이 위에서 요리를 했다. 바람에 먼지가 날리고 잉걸불이 내게 불어왔다. 요리를 얼마나 몰랐는지 삽시간에 깨달았다. 밀가루 반죽이 부풀어 오르는 데 고도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도 몰랐다. 우리가 야영하는 곳은 해발고도 914m 이상이었다.

어느 아침에는 어머니가 알려준 방법대로 조식용 비스킷을 만들었다. 하지만 비스킷은 거의 부풀지 않았고, 구두가죽 같은 맛이 났다.

"이거 플랫브레드야?" 나이 든 이가 물었다.

대답하면서 패배자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실수도 배움의 일부라고 하지 않았던가. 재료를 만지작거렸고, 다음에는 더 나은 결과가 나왔다. 완벽하지는 않았으나, 훨씬 더 비스킷이라고 알아볼 만했다. 요리는 고된 일이지만, 사람들이 아침밥을 맛있게 먹을 때 짓는 미소를 바라보며 그들과 나누는 동료애가 무척 좋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연로해졌고, 목장에서 내 도움이 필요했다. 집으로 돌아갔다. 요리할 짬이 나지 않았는데, 아버지가 암 진단을 받은 이후에는 더욱 그랬다. 목장을 운영하는 일이 내게 떨어졌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려고 애쓰느라 하루에 20시간씩 일하는 날들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 내게 지워진 부담은 커져만 갔다. 수지 균형을 맞춰 보려고 군(郡) 고속도로 부서에서 도로용 중장비를 운전하는 일을 시작했다. 보수도 좋았고, 퇴직연금도 있었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카우보이 문화와 요리에서 얻던 즐거움이 그리웠다. 하지만 어떻게 꿈을 좇느라 정부 관련 일자리가 주는 안정성을 포기한단 말인가. 게다가 소몰이는 이제 흔치 않았다. 나는 그저 때를 잘못 타고 났는지도 몰랐다.

어머니에게 내가 씨름하는 모든 문제를 털어놓았다. 현명한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네가 행복해지는 일을 해야지. 나머지는 하나님을 믿고 맡기면 된단다. 그분께서 목장 일을 도와주실 거야."

팰로 듀로의 황혼이 가까워졌다. 우리 모두에게 긴 하루였다. 무리를 16㎞ 이동시켰는데 얼어붙을 듯이 추운 날씨에서는 대단한 일이다. 멀리서 카우보이들이 텐트로 돌아오는 모습이 보인다. 통나무가 탁탁 타오르고 난로는 어마어마한 열기를 내뿜는다. 버사는 곧 치킨 프라이드 스테이크를 완벽하게 요리해 줄 거다. 감자와 블루베리 파이는 이미 주철 냄비에 넣어 두었다.

뻥 뚫린 구덩이에서 요리하던 뉴멕시코 시절 이래, 내 메뉴는 한층 세련되어졌다. 내 세상은 극적으로 변했다. 소문이 퍼졌고, 나는 카우보이들을 위해 요리하며 텍사스와 오클라호마 전역을 돌아다닌다. 주지사는 '오클라호마 공인 취사용 마차'라는 이름까지 붙여 주었다. 그래도 요리하는 매 끼니가 새로운 시험대 같다. 이런 날씨라면 한층 더 그렇다.

카우보이들이 말을 타고 들어온다. 그중 한 명이 말에서 내리더니 허공에 대고 킁킁거리면서 발을 끌며 다가온다. 다른 이들은 그의 인도를 따른다. 예고도 없이 그가 내 목에 팔을 두르더니 말한다.

"당신 덕에 집에 온 듯한 기분이 확실히 나겠어."

집. 이보다 더 좋은 칭찬은 상상할 수도 없다. 우리는 문명이 주는 안락함과 동떨어져 있다. 하지만 나는 요리를 통해 가족 같은 느낌과 소속감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 잊지 않게끔 다시 일러주자면, 팰로 듀로의 차가운 12월에도 우리에게는 말을 타고 나아가는 동안 도와줄 '누군가'가 있다. 어머니의 얘기처럼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이다.

'가이드포스트(Guideposts)'는 1945년 노먼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해 미국에서 창간된 교양잡지로, 한국판은 1965년 국내 최초 영한대역 잡지로 발간되어 현재까지 오랜 시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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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가이드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