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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나니, 인간 삶의 양면성 꿰뚫는 작품" [Weekend 문화]

데뷔 20주년 맞은 테너 국윤종
오페라 에르나니 주인공 맡아
"자신의 지혜에 기댄 선택들이
작품 속 캐릭터 죽음으로 귀결
팬데믹 시대 시사하는 바 있어"

"에르나니, 인간 삶의 양면성 꿰뚫는 작품" [Weekend 문화]
테너 국윤종. 라벨라오페라단 제공
약속된 시간보다 10여분 일찍 도착했는데도 그는 먼저 와 있었다. 지난 18일 오후 5시 서울 서초동 라벨라오페라단 사무실 한 켠에서 처음 마주한 테너 국윤종은 잠깐의 시간 틈을 놓칠새라 벌써 책상 위에 악보와 대본을 펼쳐놓고 있었다. 오는 28일과 29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오를 예정인 오페라 '에르나니'의 악보와 대본은 매우 두꺼웠다. 대본과 악보를 외우느라 힘드시겠다 말하자 그는 씩 웃으며 "행복한 고통이죠"라고 답했다.

현재 국내 오페라 무대에서 활약하는 성악가 중 테너 국윤종은 정점에 있는 주역가수로 올해 데뷔 20주년을 맞았다. 올해 코로나19 확산으로 많은 공연이 취소됐지만 그는 최근 수년간 국립오페라단의 공연을 비롯해 주요 오페라단이 선보인 무대에서 연일 주연으로 활약했다. 지금은 다시 확진자 수가 늘고 있는 추세지만 코로나19 유행이 잠시 주춤했던 11월 계획된 오페라 '에르나니'에서 그는 주인공 '에르나니' 역을 자연스레 꿰찼다.

국윤종은 "코로나가 확산되기 전이었던 연초에는 20여개 정도의 공연이 예정돼 있었는데 모두 미뤄지고 취소되면서 타격이 컸다"고 최근 상황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코로나가 나쁜 영향만을 준 것은 아니었다"며 "그간 스케줄에 쫓겨 잊었던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지난 20년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돌아보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많은 생각들이 정리됐고 고마운 은사님께 연락도 드렸으며 또 2년 전부터 준비했던 책 원고를 더 많이 쓸 수 있었다"며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예전에 느꼈던 어려움과 부족함이 어느 순간 자연스레 해결되었음을 떠올리며 감동하는 시간들이 많았다"고 말했다.

"에르나니, 인간 삶의 양면성 꿰뚫는 작품" [Weekend 문화]
오페라 '에르나니'의 주인공 테너 국윤종의 과거 공연 모습 라벨라오페라단 제공

'에르나니'는 오페라의 아버지라 불리는 베르디의 작품으로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그랜드 오페라다. 국내에선 1994년 초연된 이후 26년만에 다시 오르는 귀한 공연이다. 입체적인 인물 설정과 다층적인 서사로 독자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는 위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작품답게 오페라의 스토리라인 또한 조금 복잡하다. 16세기 초 스페인 아라곤 왕국 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에르나니는 아라곤의 영주였으나 반역죄로 추방당한 뒤 국왕 카를로에게 반기를 든 반도의 우두머리로 활동하는 인물이다. 자신의 명예 회복을 위한 복수심을 품고 있는 그에게도 연정의 대상은 있는데 바로 아름다운 여인 엘비라다. 하지만 엘비라에게는 정략결혼 상대인 귀족 실바가 있고, 국왕 역시 엘비라를 흠모하기에 한 여인을 향한 세 남자의 사각 관계도 얽혀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실바가 카를로로부터 에르나니를 구해주게 되는데 이에 대한 보답으로 에르나니는 실바에게 "이제 자신의 목숨이 실바의 것"이라며 뿔나팔을 건낸다. 그리고 "언제든 뿔나팔 소리가 들리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고 약속한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 어제의 앙숙이었던 카를로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뒤 에르나니에게 관용을 베풀게 되고 엘비라와 결혼을 허락한다. 모든 게 잘 마무리 되나 싶은데 갑자기 실바가 나타나 뿔나팔을 불고 지난 날의 약속을 지키라고 말하며 단검을 건넨다. 자신의 어리석은 맹세 때문에 에르나니는 자결을 하고 오페라는 끝난다.

국윤종은 "늘 새로운 경험을 즐기기에 이번 작품과 배역은 더욱 매력적이었다"며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변화하는 과도기 속에서 위고가 쓴 이 작품은 당시에도 매우 격렬한 토론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이었다"고 평했다. 그는 "당시에도 변혁과 개혁을 외치는 이들과 기존의 것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간의 대립은 첨예했는데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시대적 의미가 지금의 팬데믹 시대에도 동일하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며 "특히 이전의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은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이 아닌 비극으로 끝난다. 오페라 속 캐릭터들은 모두 자신이 바라는 것을 향해 매 순간 자신의 지혜에 기대 현명한 선택을 하려 하지만 이후 그것이 자신의 목숨을 빼앗는 어리석은 결정으로 뒤바뀐다"고 말했다.


이번 공연에서 관객들이 눈과 귀를 쫑긋 세워야 할 장면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에 국윤종은 "3막에서 에르나니와 실바가 연합을 맺고 군사들의 동맹을 약속하는 합창곡 '스페인 혁명가'가 나오는데 뮤지컬 '레미제라블'에서 나오는 혁명가가 이 곡을 모티프로 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다"고 했다.

공연이 열흘 앞으로 다가온 요즘, 당황스러운 코로나 확산세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국윤종은 "마음이 아프지만 시민들의 건강을 생각하면 현재 두 번의 공연이 계획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며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