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칼럼 >

[fn광장] 여왕과 광대의 콜라보가 준 위로

[fn광장] 여왕과 광대의 콜라보가 준 위로
영국에서는 1912년 시작돼 올해로 108회를 맞은 연례 공연 행사가 있다. 단 하루(One Night Only)만 열리는 쇼의 이름은 '로열 버라이어티 퍼포먼스'로 엘리자베스 여왕, 찰스 왕세자, 윌리엄 왕세손, 해리 왕자 등 왕실 멤버들 중 누군가는 반드시 발코니 객석에 앉아서 공연을 관람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출연자로는 그해 영국에서 큰 인기를 얻은 국내외 스타 및 공연팀들을 초청한다. 장르는 대중음악, 스탠드업 코미디, 뮤지컬 등으로 다양하며 자선공연이기에 출연료는 없지만 유서 깊은 대표 행사에 참여한다는 의의 때문에 누구나 무대에 서고 싶어한다.

그런데 올해 3월부터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런던 웨스트엔드 극장가가 모두 문을 닫았다. 확진자 명단에 왕위계승 서열 1위인 찰스 왕세자도 포함돼 있었고, 4월 예정이었던 공연계 아카데미상인 로런스 올리비에 어워즈도 취소됐다. 따라서 매년 11월쯤 주로 런던에서 열리던 이 행사도 취소 위기에 빠졌으나 런던이 아닌 블랙풀에서 행사를 개최하기로 결정하고 방역당국의 방침에 따라 사상 처음으로 버추얼 관객석 마련이라는 대안을 마련했다. 그동안 관중석에 관객의 사진을 설치하고 공연이나 스포츠경기를 무관중으로 진행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 쇼에서는 객석에 모니터 패널을 설치해서 실제로 자택에서 온라인으로 시청하는 관객의 모습이 실시간으로 무대 위의 출연자들에게도 보이게 했다.

그 덕분에 무사히 녹화를 했고 지난 11일 드디어 영국 전역에 방송됐다. 모니터 속의 관객들은 편한 옷차림으로 거실이나 식탁에 모여서 실시간으로 관람에 참여했다. 유명 코미디언이자 뮤지컬 배우인 제이슨 맨포드는 이른바 코로나 유머로 객석을 들었다놨다. 버추얼 관객이 되면 보기 싫은 출연자가 나올 때 음소거하면 되고 힘들게 옷을 차려입고 극장을 찾아와서 인터미션에 와인까지 사서 마실 필요도 없으며, 평생 몇 번 듣지 못하는 아버지로부터의 조언을 집안에서 실컷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영국 오디션 프로그램 올해 우승자에게는 '그가 만약 미국 오디션에 출연했으면 아직도 최종 승자를 가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미국 대선을 빗댄 유머도 던졌다. 그의 활약에서 어려운 시대에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게 해주는 광대들의 존재 이유를 보았다.

쇼의 하이라이트는 올 한 해 동안 자선행사의 모든 기록을 깬 톰 무어 할아버지가 가수 마이클 볼의 무대에서 깜짝 영상으로 출연한 순간이었다. 2차대전 참전용사로서 대위로 전역해 캡틴 톰으로 유명한 톰 무어는 100세를 맞아 자신이 아플 때마다 건강을 돌봐준 영국 국가보건서비스(NHS)를 위한 모금활동을 시작해 4000만파운드(약 600억원) 가까이 모은 인물이다. 그는 2차대전 최전선에서 싸울 때 국민들로부터 받은 지지를 잊지 않았고, 이번에는 코로나와의 전쟁에서 최전선에 있는 의료진을 국민으로서 돕겠다는 것이 자선행사를 시작한 계기였다. 마이클 볼은 그를 위해 '당신은 결코 혼자 걷지 않아요'(You'll Never Walk Alone)를 발표했고, 톰 무어의 목소리가 실린 음반은 차트 판매 1위까지 차지했고 이 쇼에서도 대미를 장식했다.


108년 전 영국의 취약계층은 빈곤에 시달리고 있었다. 청년실업도 심각했으나 실업수당이나 실업급여도 없었고, 사회보장 제도는 걸음마 수준이었다. 로열 버라이어티 퍼포먼스는 그때부터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영국 왕실이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자선'이라는 방식으로 광대들과 함께 국민에게 위로와 기쁨을 선사해왔다.

조용신 연극 뮤지컬 작가·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