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 전쟁이란 단어가 떠오르는 고대 국가는 바로 로마제국이다. 당시 로마제국이 유럽의 패권국가가 될 수 있었던 요인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특히 무기에 주목한다. 소규모 도시국가 수준에 불과하던 로마가 기원전 4세기 무렵부터 원정 전쟁을 통해 제국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압도적인 군사력이었다. 그리고 그 군사력의 핵심은 바로 당시의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자신감이었다.
유럽에서 비교적 작은 체격을 가진 농경민족이던 로마 군대는 알프스 북쪽의 호전적이고 사냥에 능한 이민족들과 맞서 싸우면서 당시로서는 최첨단 무기인 양날 단검 글라디우스(Gladius)와 개량 방패 그리고 필룸(Pilum)이라는 개량 투창으로 무장했다. 그 덕에 로마 군대는 연전연승했고 오랫동안 유럽의 패권국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로마 군대의 신무기가 수천년 동안 작동했던 전쟁승리 공식의 게임체인저 역할을 한 것이다.
원정 소송의 시대가 도래한 현재, 변호사 3만명 시대를 맞이한 우리나라 법조계의 글로벌 경쟁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국제소송을 보면 법률 선진국인 미국과 영국, 캐나다 법조계는 이미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분석기술을 활용한 '리걸테크'라는 최첨단 무기로 무장해 각종 국제분쟁에서 승소율을 대폭 높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법조계가 이달 리걸테크협의회를 출범한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AI를 활용해 방대한 전자문서와 데이터 안에서 소송에 필요한 정보만 빠르고 정확하게 추려 변호사에게 보고하는 '프레딕티브 코딩기술(Predictive Coding Technology)', 빅데이터 분석을 기반으로 승소 확률을 예측하거나 적정 합의금 또는 손해배상액 범위를 예측하는 시스템 등은 이미 국제소송에서 일반화된 지 오래다.
국내에서도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지난 칼럼에 소개한 대로 전자증거개시 제도가 21세기 특허소송의 핵심임을 간파한 특허청은 e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에 적극적이다. 또 금융위원회는 글로벌 회계 시장이 클라우드 기반의 AI와 머신러닝을 활용한 예측분석(Predictive Analytics) 역량 강화로 무게중심이 급속히 이동하고 있음을 읽어내고 신속 대응을 천명했다. 지난주 금융위는 2007년부터 시행 중인 현행 공인회계사 시험과목을 14년 만에 전면 개편키로 했다. 이 중 회계감사 과목의 경우 IT 활용과 빅데이터 분석 능력을 제고하기 위해 IT 관련 출제 비중을 15% 이상으로 높인다. 또 회계사시험에 합격한 뒤 받는 실무연수에서도 IT 관련 교육을 두배로 늘릴 계획이다. 사물인터넷을 활용한 감사증거수집 방법으로 내부통제를 강화하고, 블록체인 기술을 접목해 회계장부 위·변조를 원천차단함으로써 회계투명성을 높이는 신기술을 숙련하게 된다.
수출 중심의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은 무역분쟁과 관련한 국제소송에 항상 노출돼 있다. 하지만 우리 수출기업들은 리걸테크에 낯설고, 전자증거개시 제도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국제소송에서 패소하는 사례가 잦다. 그 결과 우리 기업들이 외국기업에 막대한 손해배상액을 지급하는 형편이다.
최첨단 리걸테크로 무장한 한국의 법조 경쟁력은 국제소송에 시달리는 우리나라 기업들에 든든한 우군이 될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K법률 서비스 자체가 장차 IT강국 코리아의 차세대 수출 주역으로 떠오를 수 있다. 국제소송 시장이 리걸테크라는 게임체인저의 등장으로 급속히 재편되고 있는 이때 대한민국 법조인들의 세계 진출을 기대해본다.
심재훈 미국 변호사, 기업분쟁 해결 분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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