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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러진 남편 절망적인 진단에도… 일어설 것이라는 목소리 믿었다 [Guideposts]

극진한 간호와 기도로 남편 일으킨 칼라 매킨타이어
마라톤 35차례나 해냈던 남편
2015년 휴가지에서 뇌출혈로 혼수상태
미국으로 이송되던 비행기에서 들려온
"내가 네 곁에 있다는 걸 기억하라"
의사들조차 기대하지 말라 했지만
포기하지 않을 그를 믿었다
결국 의식 돌아온 후 매일 좋아져
2년후인 2017년 장애인 3종경기 출전
"남편의 집념은 나에게도 축복이 됐다"

쓰러진 남편 절망적인 진단에도… 일어설 것이라는 목소리 믿었다 [Guideposts]
뇌출혈로 쓰러진 남편 토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고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했지만 아내인 칼라 매킨타이어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토드는 회복할 것이니라. 하지만 다가올 날들이 쉽지는 않다. 내가 네 곁에 있다는 걸 기억하거라." 칼라는 기도할 때 들려온 누군가의 또렷하고 위엄있는 음성을 단 한번도 의심한 적이 없다.
쓰러진 남편 절망적인 진단에도… 일어설 것이라는 목소리 믿었다 [Guideposts]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아내의 극진한 간호와 간절한 기도로 건강을 회복한 토드 매킨타이어가 장애인들을 위한 3종 경기인 '레온 3종 경기'에 출전해 장애인용 손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다.
인디애나주 북서쪽에 자리한 울프호의 청록색 물에 수영모자 수백개가 일렁거렀다. 레온 3종 경기 참가자 사이에서 남편 토드를 한 번이라도 보려고 기를 썼다. "아빠가 괜찮을까?" 10대 딸 에밀리에게 물었다. 첫번째 주자들은 이미 두번째 구간인 사이클 경주를 위해 해변을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토드와 나는 둘 다 재혼이었고, 결혼하고 첫 7년은 남편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강하고 독립적이었다. 그는 그야말로 경쟁하려고 사는 사람이었다. 3종 경기를 75차례, 마라톤을 35차례 해냈으며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지녔다. 휴가는 시합에 나가는 데 썼다.

남편의 집념이 우리 부부, 가족, 교회로부터 앗아간 시간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2015년에 온 세상이 뒤집힐 때까지 그랬다. 거의 2년이 다 되도록 내게 중요한 건 오로지 남편이 투지를 되찾아서 지기 싫어하는 예전의 토드가 되도록 돕는 일이었다.

2015년 6월이었다. 아루바(카리브해에 있는 네덜란드령 섬)에서 결혼기념일을 좀 일찍 축하하면서 보내는 셋째날 밤, 막 저녁을 먹고 들어오던 참이었다. "나 심장마비 같아. 가슴이 너무 아파." 남편이 말했다. 그러나 나는 남편이 심장마비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지난 4월 보스턴 마라톤을 완주했고, 이미 다음해 대회에 참가할 자격까지 얻은 상태였다. "병원에 가봐야겠어." 남편이 또 강하게 말했다.

택시가 우리를 작은 병원에 내려주었고, 심전도 결과는 남편의 걱정이 사실임을 입증했다. 미국이라면 해냈을 긴급 조치들을 이곳 의사들은 하지 못했다. "환자에게 혈액희석제를 혼합해서 처방하겠습니다. 그러면 귀국할 때까지는 충분히 안정될 겁니다."

남편이 믿을 만한 사람에게 맡겨지길 기도했다. 감사 기도를 드리고 매주 참석하는 예배를 제외하면 결코 기도를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다. 사실 남편을 위해 기도할 만큼 걱정스러운 상황이라는 게 두려웠다. 다음날 아침 병원과 이야기해보니 남편은 괜찮았다. 그러다가 일상적인 뇌스캔을 하던 중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남편에게 뇌출혈이 있었다. 당장 응급수술이 필요했다.

"우리가 환자를 살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의사의 말이었다. 션트(뇌에 차오르는 액체를 복강으로 빼내는 관)를 삽입했지만 남편의 상태는 급격히 나빠졌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나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저 남편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남편이 비행을 견디지 못할 수 있다는 경고도 있었지만, 플로리다주 포트로더데일에 있는 외상센터로 가는 환자 수송기를 마련했다. 미국에 전화해서 에밀리와 남편의 장성한 두 아들, 그레그와 콜비에게 상황을 알렸다.

나는 탈진을 넘어선 상태였다. 비행기에서 남편 곁에 앉아 있는데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었다. 고개를 돌렸다. 눈부신 하얀 예복을 차려입은 남자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토드는 회복할 것이니라. 하지만 다가올 날들이 쉽지는 않다. 내가 네 곁에 있다는 걸 기억하거라."

그의 목소리는 위로가 되면서도 힘이 넘쳤고, 위엄 있으면서도 안심이 되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런 확신을 주실 수 있었다. 이 사내가 정말 그분일까? 이 사람이 예수님이란 말인가? 아주 많은 질문이 떠올랐지만, 곧 환영이 사라졌다. 내 곁에는 토드뿐이었고, 엔진 소리와 남편의 생명을 유지해 주는 인공호흡 장치의 소음만 빼면 비행기는 고요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구급차가 우리를 외상센터로 부리나케 데려갔다. 또 수술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원래 자리에서 빠져나온 뇌간 수술이었다. 의사들은 희망을 품지 않았다. "환자는 아마 주요 뇌 기능을 회복하지 못할 겁니다."

의학적으로 내가 매달릴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었다. 비행기에서 본 설명할 수 없는 환영과 떨칠 수 없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당신들은 토드를 몰라.' 그에게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집념이 있었다. 피츠버그로 돌아와서 남편을 중환자실에 기꺼이 받아주겠다는 사람을 찾을 때까지 신경외과 의사 10명에게 전화했다. 46일 동안 의사들은 남편의 뇌에서 수액을 빼내고 감염과 싸울 약을 투약했다. 나는 한시도 남편 곁을 떠나지 않았다.

마침내 급성환자 장기치료센터로 옮길 수 있을 만큼 토드가 안정되었다. 눈은 떴지만 여전히 반응이 없었고, 기도에 있는 튜브로 호흡했다.

8월 4일, 화난 상태로 잠에서 깼다. 여덟번째 결혼기념일이었고, 아루바에서부터 거의 두 달이 지났다. 기진맥진했다. '주님, 남편이 여전히 저기 있다면 제게 무언가 보여주어야 한다고요!'

치료센터로 가는 도중에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언어치료사에게 말했다. "기도에 있는 구멍 좀 막아 주세요. 남편이 말할 수 있다면 뇌 활동이 있다는 뜻이에요. 말하지 못한다면…."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치료사는 머뭇거리며 토드의 목에 있는 구멍을 막고 물러섰다. 남편은 미동도 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내 입술을 남편 귀 가까이에 댔다. "당신이 나서야 해. 말 좀 해봐. 나 말고는 아무도 당신을 믿지 않아. 날 도와서 사람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봐." 아무 응답도 없었다. 눈 깜빡임조차 없었다.

"사랑해. 오피 버서리(Happy anniversary, '결혼기념일 축하해'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서 나온 말)." 말은 정확하지 않았고, 겨우 속삭이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했다.

"오, 여보." 나는 말하면서 몸을 돌렸다. 언어치료사와 나는 눈길을 주고받았다. "다시 검사해야겠어요." 치료사가 말했다. 새로운 진단도 마찬가지로 암담했다.

"락트인증후군입니다. 환자가 의식은 있지만 움직이지 못하고, 거의 모든 근육이 마비돼 언어로 소통할 수 없는 신경학적 질환입니다. 호전되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나는 남편을 재활병원으로 옮기겠다고 주장했다. 토드는 기도 튜브를 떼고 매일 치료를 받았다. 의식이 좀 더 명료해졌고 소리도 낼 수 있었다. 의사들은 과한 기대를 말라고 경고했으나, 나는 비행기에서 봤던 환영에 매달렸다.

9월 마지막 날, 남편의 기 치료사가 두피를 살피다가 말했다. "내게 전해지는 에너지가 불타는 듯이 뜨거워요." 의사들이 MRI를 찍자고 했다. 션트 주변에 뇌 감염이 있었다. 의사가 션트를 제거했다. 수술 도중에 무슨 일인가가 벌어졌는데, 마치 남편을 깨울 열쇠가 돌아간 것 같았다.

토드는 거의 밤새 정신이 초롱초롱했다. 말도 더 또렷해지고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었으며 고개도 돌렸다.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냥 벌어지는 일이 아니에요." 남편의 주치의가 말했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등록하는 거 기억했겠지? 9월이 마감이었는데." 어느날 토드가 말했다.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가 마라톤을 뛸 방법이 없다는 걸 어떻게 얘기한단 말인가? 남편은 혼자서 일어서지도 못했다. 물론 등록신청서는 보내지 않았다. "응. 기억했어." 대답했지만 거짓말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토드의 기분을 망칠 순 없었다.

10월 22일은 에밀리의 생일이었다. 남편은 스스로 딸에게 전화해서 매우 떨리는 목소리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줬다.

남편은 거의 매일 호전되었다. 그의 투지와 열의에 모두 놀랐다. 남편은 크리스마스 직전에 집으로 돌아왔으며, 휠체어를 타고 돌아다녔다. 다음해 4월에는 파트타임으로 직장에 복귀했다. 노동절 주말에 성대한 파티를 열었다. 토드가 모두의 성원과 기도에 감사를 표했을 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특히 아내에게 고마워요. 칼라가 없었다면 나는 말 그대로 여기 있지 못했을 테니까요." 남편의 말이 느릿느릿하지만 신중하게 흘러나왔다.

우리 관계도 완전히 변했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우리 부부가 진정으로 통한다고 느꼈다. 함께 기도하고,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낀다. 여정 내내 예수님께서는 우리 곁에 계셨다.

2017년 봄 무렵, 토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해냈다. 하지만 나는 남편이 지팡이를 짚고 더 당당하게 걷는 도전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그에게는 더 큰 시험대가 필요했다. 나는 장애인을 위한 시합을 찾아보다가, 원래는 상이용사에게 초점을 맞춘 초보자를 위한 3종 경기인 '레온 3종 경기'를 발견했다. 전화해보니 27년간 해군에서 복무하고 퇴역한 토드는 당연히 출전 자격이 있었다.

"참가하고 싶어." 남편이 말했고, 그 눈에 익숙한 빛이 빛났다. 토드는 안전벨트를 만들었고 덕분에 러닝머신 위에서 걸을 수 있었다. 손자전거를 이용해서 자전거 구간을 훈련했다. 수영을 시작하고, 되살려낸 스프레드시트에 매일 기록을 표시했다.

이제 딸과 함께 울프호 기슭에 서 있자니 뒤늦게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줄을 잇는 경주 참가자 중 다수가 손발 절단 수술을 받은 사람이었고, 연이어 쏟아져 나왔다. 남편은 흔적도 없었다. 다른 많은 참가자와 마찬가지로 남편도 도우미와 함께 수영했다. 마침내 남편이 호수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손자전거에 올랐다. 몇 분 후 남편은 무리를 쫓아가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남편의 집념이 더는 불가사의하지 않았고 우리 결혼 생활에 재앙이 되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의 앞날에 있을 어려움을 온전히 아셨기에 집념이라는 축복을 내려주셨다. 그리고 남편의 집념은 불가능에서 희망을 얻었던 비행기에서의 그 순간처럼 내게도 축복이었다.

'가이드포스트(Guideposts)'는 1945년 노먼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해 미국에서 창간된 교양잡지로, 한국판은 1965년 국내 최초 영한대역 잡지로 발간되어 현재까지 오랜 시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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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가이드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