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법원에서 벌어지는 원정소송에서 최종 승패의 열쇠는 판사가 아니라 12명의 평범한 일반인들이 쥐고 있다. 형사소송은 물론 민사소송에서도 배심원 제도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관할 지역에서 무작위로 선정한 일반인들에게 피고 기업의 법적 책임 여부를 묻는 배심원 제도는 민주주의 의사결정 방식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원정소송에 임하는 우리 기업들은 미국 배심원 제도에 어떻게 대응하고 그 전략적 활용 가치를 높일 수 있을까. 먼저 배심원단의 구성 배경을 이해해야 한다. 배심원은 법원 관할지에 거주하는 성인 시민권자 중에서 무작위로 후보군을 뽑는다. 법원은 배심원에게 따로 보수를 지급하지 않고 교통비 정도의 간단한 실비 지급을 원칙으로 한다. 따라서 장기간 진행되는 재판에 꼬박꼬박 참석해야 하는 자영업자나 전문직 종사자는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여하는 시간만큼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는 셈이다.
이렇다보니 본인이 배심원 후보군에 뽑힌 경우 최종 배심원 그룹에 선택되지 않도록 배심원 선발 질문에 의도적으로 '전략적인 회피 대답'을 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예를 들어 자신이 해당 사건과 잠재적 이해충돌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과장해서 답변하거나, 해당 사건에 편견이 있음을 강조하거나, 노골적으로 원고 또는 피고 측에 유리할 수 있는 성향을 드러내서 제척당하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매일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기꺼이 법원에 나와서 장기간 배심원으로 봉사할 자세가 된 은퇴자와 주부가 최종 선발될 확률이 높다. 배심원으로 하루 종일 법원에서 봉사해도 원래 직장에서 고정급으로 정해진 월급이 나오는 공무원과 교사도 적극적으로 최종 배심원에 선택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우리 기업 담당자들은 미국 원정소송에서 만나게 될 배심원단의 주류를 이루는 미국의 은퇴자, 주부, 공무원, 교사들의 정서와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공감능력이 필요하다.
법률 전문가일 필요가 없는 12명의 일반인들이 특정 기업의 행위에 대한 법적 책임을 판단하는 자리에 앉은 순간 떠올리는 것은 당연히 그 기업에 대한 도덕적 질문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자연스럽게 그 기업의 사회적책임(CSR) 준수 여부에 대한 이미지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글로벌 시장을 상대로 상품과 서비스를 수출하는 우리 기업들은 글로벌 이슈에 맞는 CSR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 더불어 CSR을 일관되게 운영함으로써 진정성을 보여줘야 한다. 일시적 이벤트나 최고경영자 마음대로 의제나 대상을 수시로 바꾸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SK가 최근 글로벌 CSR 강화 전략으로 환경·사회·지배구조를 필수 지표로 삼는 ESG 경영을 선언한 것은 매우 고무적이다. 특히 재생에너지 확산 글로벌 캠페인인 RE100에 전격 가입함으로써 기후변화대응 국제 공조에 적극 협력하는 SK를 잠재적 배심원들은 기억할 것이다. 또한 배심원들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마스크 품귀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기술지원과 전 세계 네트워크 지원을 통해 마스크 기부에 앞장선 삼성전자의 이미지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12년간 꾸준하게 지구 사막화에 맞서 생태 복원 운동을 펴온 현대차그룹의 진정성을 인정할 것이다.
배심원들을 상대로 한 승소 전략의 핵심은 신뢰성이다. 아무리 좋은 논리와 증거가 있어도 먼저 신뢰가 있어야 배심원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미국 법원 승소의 법칙이다.
심재훈 미국 변호사, 기업분쟁 해결 분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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