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현 덕수궁관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展
1930년대 자유와 낭만, 우정과 연대, 전위와 융합
박태원 콩트에 이상 삽화, 백석 시엔 정현웅 그림
김환기가 문학잡지 표지를, 600여점 방대한 전시
"수많은 현대성의 징후들..암울한 시대 장엄 미학"
이상을 모델로한 구본웅의 '친구의 초상(1935)' /사진=국립현대미술관
[파이낸셜뉴스] "유모어 콩트라지만 그러나 이것은 슬픈 이야기다. 그도 그럴 밖에 없은 것이 이것은 죽은 이상과 그의 찻집 제비의 이야기니까. 제비는 이를테면 이제까지 있었던 가장 슬픈 찻집이요 또한 이상은 말하자면 우리의 가장 슬픈 동무이었다." 1939년 신문사에 콩트 '제비' 연재를 시작하며 쓴 이글의 작자는 박태원이다. 그가 추억하는 인물은 한국 근대문학 전위의 상징 이상이다.
극단적 실험성으로 문화적 충격까지 안겼던 연작시 '오감도'를 내놓기 한해전인 1933년, 이상은 경성 종로에 다방 제비를 열었다. 비록 몇해 못가 마담 금홍은 사라지고 나나오라(축음기)는 팔려나가는 파산의 길을 가지만 당대 시인, 소설가, 화가들은 이곳에서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르네 클레르와 장 콕토의 영화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박태원은 말할 것도 없고 이상의 절친 화가 구본웅, 문인기자 시대를 연 김기림 등 무수한 예술가들이 암울한 시대, 이 슬픈 찻집에 모여 찬란한 텍스트를 만들어냈다.
다방 제비에 걸려있었던 구본웅의 '인형이 있는 정물(1937)' /사진=국립현대미술관
문학평론가 조용복(광운대 교수)은 당시를 이렇게 정리한다. "그 시대 문학예술이 가리키는 것은 당대가 아니라 미래다. 현실을 박차고 뛰어나가 미래의 시간을 향해 질주한다. 그것은 정신의 싸움이자 생명을 향한 싸움이었다. 그곳에 화가, 문인으로서 경계의 문지방을 건너는 악전고투, 장엄미학이 있었다."
박태원이 신문에 연재한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삽화는 이상이 그린 것이다. 르네 클레르 감독 '최후의 억만장자'를 소재로 한 박태원의 또다른 콩트엔 정현웅이 그림을 그렸다. 구본웅은 이상의 소설 '봉별기'에서 화우 K로 등장한다. 그가 1932년 그린 '친구의 초상'은 이상의 얼굴이다. 도쿄에 머물던 시기 이상은 연희전문 출신 초현실주의 청년들이 만든 '삼사문학' 발간에 참여한다. 이때 유학중이던 김환기가 이 잡지 표지를, 삽화는 길진섭이 직접 그렸다. 이 시대 화가·문인들의 우정과 지적 연대는 끝도 없다. 이 광할한 계보와 네트워크, 기념비적인 작품들 전시가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개막했다.
백석 글, 정현웅 그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1938 /사진=국립현대미술관
타이틀이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다. 문학가 정지용 이상 박태원 김기림 이태준 김광균, 화가 구본웅 황술조 김용준 최재덕 이쾌대 이중섭 김환기 등 1930∼1950년대 한국 문학·미술을 주도한 이들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140여점 작품, 200여점 서지자료, 300여점에 이르는 시각자료 등 출품작들이 실로 방대하다.
전시장 곳곳에 화가·문인들의 애틋한 정과 낭만, 자유와 저항의 기백이 흘러넘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 이렇게 시작하는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힌 당나귀'에 앉은 자세로 조용히 먼 곳을 응시하는 나타샤, 그 앞에 천진난만한 당나귀를 그려넣은 이는 정현웅이다. 제한된 인쇄기술로 색깔은 주홍빛이 전부이긴 하나 눈이 푹푹 내려앉은 그 밤의 정경을 누가 이보다 사무치게 전할 수 있었을까. 둘은 신문사에서 같이 일했다. 정현웅은 늘 바라봤던 백석의 옆 얼굴을 그려 잡지에 발표한 적 있고 백석은 만주여행중 지은 시를 정현웅에게 헌정했다.
이중섭,'시인 구상의 가족, 1955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이 그린 '시인 구상의 가족'은 화가가 구상의 집에 얹혀살았던 1955년 작품이다. 아버지로부터 자전거를 선물받은 구상의 아들은 이토록 기쁠수가 없다. 화가는 그 가족을 부러운 듯 바라본다. 일본에 두고온 가족과의 재회를 꿈꾸며 작업에 매달렸지만 거듭된 실패로 모든 희망을 포기했던 이 말년의 시기 이중섭을 거둔 이가 구상이다.
문인과 화가들의 이종결합에서 판을 확장시킨 주요 인물은 김기림·이여성 커플이다. 김기림은 신혼시절 튤립을 한아름 안고 집에 찾아온 신문사 선배 이여성을 기억하며 "그의 위대한 콧마루 위에 걸려서 끊임없이 약소민족의 대국을 통찰하는 검은 로이드 안경과 붉은 튤립 향내나던 그때 그밤을 잊을 수 없다"는 글을 쓴 적 있다.
이여성은 한국 근대미술의 기수 이쾌대의 친형이다. '와사등' 시인 김광균은 김기림의 후예다. 최재덕, 김만형, 이쾌대, 유영국 같은 화가가 신진 시인 김광균에게 소개되는 과정에 기라성 같은 선배 김기림이 있었다. 시를 쓰며 사업을 했던 김광균은 빈곤한 화가들의 든든한 후원자이기도 했다. 부산 피난시절 그의 사무실 뒷벽에 걸어뒀던 작품이 김환기의 '달밤'이다. 큼직하고 둥그런 보름달 아래 바닷가 배들 또한 달과 같이 두둥실 떠있다.
김환기, 달밤, 1951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전위와 융합의 상징 제비 다방(1전시실)에서 출발해 거대한 지상(紙上)미술관(2전시실)으로 향한다.
도서관 검색대 모습을 한 이곳에서 백석의 '사슴'을 비롯한 수많은 근대기 시집 원본은 반드시 챙겨봐야한다. 문인·미술인 커플들의 관계와 계보를 보여주는 이인행각(3전시실)을 지나 문학적 재능까지 겸비했던 김환기·천경자·한묵·박고석 등 6인의 화가 글과 그림(4전시실)이 마지막을 장식한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과 근대미술팀장은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수많은 현대성의 징후들이 1930년대 이미 체험됐다는 것에 감동이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전시는 5월 30일까지.
수많은 근대기 시집들 원본을 볼 수 있는 2전시실 지상의 미술관 /사진=국립현대미술관
jins@fnnews.com 최진숙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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