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영리 공동체 운영하는 샌디 블레어
12년간의 군복무후 마주한 방황의 시절
일자리가 있다면 어디든 찾아갔지만
어김없이 돌아오는 것은 '거절' 이었다
막다른 길에 선 내게 길을 보여준 하나님
방네칸 집에서 시작해 목장주택까지
군트라우마·빈곤에 시달리는 여성들이
함께 살아갈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우리는 누구나 도움을 필요로 한다
그들에 내 손을 내밀수 있음에 감사한다
퇴역 군인 출신인 샌디 블레어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여성 퇴역 군인들의 자립을 돕는 비영리 단체 '오퍼레이션 웹스'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누구나 도움을 필요로 한다. 특히 퇴역 군인들은 더욱 그렇다"면서 "하나님께서는 막다른 길처럼 보였던 것을 사랑과 봉사의 길로 바꿔주셨다"고 고백했다.
미국에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퇴역 군인을 예우한다. 하지만 여기서 소외된 집단도 있다. 바로 여군이다.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여성이며, 공군 퇴역 군인이다. 의병제대로 조기퇴역할 때까지 12년을 복역했다.
다른 퇴역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민간인으로서 자리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일자리를 구하지는 못했다. 오랜 시간 군대의 체계와 전우애에 익숙해진 나는 외로움과 방황 속에 살아갔다. 마땅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던 시간을 감내했고, 그러는 동안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여성 퇴역 군인은 보통 흔치 않은 문제들에 직면한다. 그들은 많은 경우 혼자 자녀를 양육한다. 나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퇴역 후에는 대개 부양의 책임을 진다. 나 또한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간호했다. 차별을 당하기도 한다. 내 경우도 일자리를 구할 때 그 일을 하기에는 경력이 너무 과하다는 이유로 수없이 거절을 당해야 했다.
미국으로 이민 온 부모님은 내게 자립심과 근면의 가치를 가르치셨다. 살면서 이 가르침은 두 가지 방식으로 도움이 되었다. 특히 군대에서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엄격한 훈련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임했고, 승급의 기회도 잡을 수 있었다. 제대 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면서도 나는 도움을 청하는 법을 몰랐다. 많은 퇴역 군인들이 그렇듯 나 또한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완전하게 자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신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셨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동력이 되는 비전이다. 현재 나는 캘리포니아주 중부에서 '오퍼레이션 웹스(Operation WEBS)'라는 비영리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의 임무는 여성 퇴역 군인들을 사랑과 상호 협력의 공동체로 초대해 돕는 것이다.
처음에는 작은 규모로 시작했다. 우선 캘리포니아 반덴버그 공군기지 근처의 한 마을에 집을 마련했다. 나는 그곳을 '쉼터'라고 불렀다. 방 4개짜리 소박한 집으로, 여성 퇴역 군인들이 함께 머물면서 사회에 나가 자리를 잡고 충만한 삶을 시작하도록 서로 협력하는 공간이었다.
현재는 마을 외곽에 있는 작은 목장으로 시설을 확장하는 중이다. 그곳에 바퀴 달린 이동식 소형 주택을 몇 채 지을 계획이다. 한데 모인 아늑한 방 한 개짜리 주택들은 협력적인 공동체를 이룰 것이다.
사무치게 외로웠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던 방황의 시절 나에게 꼭 필요했던 그런 공간이다. 지금은 그 시절들을 감사히 여긴다. 그때 겪은 어려움으로 인해 여성 퇴역 군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막다른 길처럼 보였던 것을 사랑과 봉사의 길로 바꿔주셨다.
나는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왔다. 내가 아홉살이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 큰 기회를 찾아 우리 여섯 남매를 데리고 자메이카에서 뉴저지로 오셨다. 부모님은 신앙심이 깊은 분들이셨고, 우리도 그렇게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아버지는 기계공이셨고, 어머니는 병원에서 일하면서 남의 집 청소 일도 하셨다. 두 분 모두 자부심이 강하고 지독하게 독립적이었다. 아버지가 늘 말씀하신 인생의 모토는 이런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매일 일터로 나가고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말라."
그런 가르침 덕분에 군대라는 곳에 끌렸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에게 공구 다루는 법을 배웠던 터라 처음에는 공군 정비병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자한테는 맞지 않는 일이라면서 의무대에 지원해 보라고 조언하셨다. 그래서 구강진료 보조병으로 지원해 훈련을 받았다. 나는 10년 가까이 그 일을 했다. 그러는 동안 결혼과 이혼을 거쳤고, 두 아이를 맡아 기르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군 복무를 한 곳이 플로리다의 틴들 공군기지였다.
퇴역 후 치과 위생사 자리에 지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 일을 하기에는 경력이 필요 이상으로 많아요." 아니면 군대에서 받은 훈련이 주면허 자격요건에 맞지 않다고 했다.
돈이 바닥나고 있었다. 급기야 아이들을 데리고 가장 절친한 친구 집에 얹혀 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즈음에는 패스트푸드점을 포함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일자리를 알아봤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던 나로서는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이 비참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일자리를 찾으러 외출을 했다. '내가 아니었다면 우리 아이들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엄마인 내가 아이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친구한테도 짐만 될 뿐이었다. 나는 실패자였다.
어떻게 생을 마감할지 생각했다. 이런 고민에서 하나님은 배제했다. 하나님께 무척 화가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태어나 32년 동안 해야 할 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다했다. 그런데 고작 이런 꼴로 산단 말이야? 무슨 신이 이래? 주님은 결국 아무것도 예비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샌디, 아빠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어. 지금 중환자실에 계셔. 네가 와주면 좋겠다. 올 수 있니?"
부모님은 조지아주로 이사해 살고 계셨다. 엄마는 애틀랜타에 있는 한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고, 아버지도 기계공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일하는 도중 쓰러지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나이는 예순둘이었다.
그 전화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그것이 내 목숨을 구해 주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 엄마가 일하는 동안 아버지를 간호했다. 강인하고 독립적이던 아버지가 이토록 무력해지시다니. 처음에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차츰 아버지를 돌보는 일이 소중하게 느껴졌고, 평생을 쉬지 않고 일한 이 사람을 좀 더 다정하게 대하고 싶어졌다.
그 일이 터진 직후 부모님 집으로 우편물 한 통이 도착했다. 애틀랜타에서 멀지 않은 디캘브 카운티 경찰서에 자리가 났다는 통지서였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다. 우편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경찰 일을 해본 적이 있었다.
경찰시험에 합격한 뒤 디캘브 카운티 소속 경찰관으로 5년 가까이 근무했다. 낮에는 아버지를 간호하기 위해 시간을 비워 두었고, 그 대신 야간 순찰업무를 맡았다. 순찰을 하면서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사회적 문제를 두 눈으로 목격했다. 어두운 밤 도시를 순찰하면서 내가 마주친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하나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캘리포니아로 대학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내 자매들 중 하나가 오컷에 살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주 중부 산타마리아 근처에 있는 노동자 계층이 주로 사는 동네였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에 사는 언니의 집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부동산중개업과 커뮤니티 칼리지의 행정보조 일을 구했다.
아이들은 이제 모두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났다. 마침내 애틀랜타에서 야간 순찰을 돌 때 하나님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된 것일까?
샌타마리아는 애틀랜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근처에 공군기지가 있어서 퇴역 군인이 많은 지역이었다. 제대 후 힘들었던 시절 내게 필요했던 게 뭐였는지 생각했다. 주거공간, 퇴역 군인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것 그리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의 유대와 지지였다.
'오퍼레이션 타이니 홈(Operation Tiny Home)'이라는 단체를 알게 된 이후 머릿속 아이디어가 점차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오퍼레이션 타이니 홈'은 바퀴 달린 방 한 칸짜리 소형 주택을 지어 전국의 퇴역 군인들에게 안전한 공동체를 제공하는 단체다. 그렇다면 나도 여성 퇴역 군인들을 위해 그런 공동체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언니와 나는 함께 재원을 마련해 샌타마리아시 경계를 바로 벗어난 곳에 위치한 조그만 목장 부지를 매입했다. 소수의 여성 퇴역 군인들이 소형 주택에 살면서 공동정원을 가꾸고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우리는 가족을 목장으로 옮겨 살게 하고 오컷에 있는 집을 일종의 쉼터로 개조했다. 현재는 목장에 소형 주택 공동체를 조성하기 위해 기금을 모으는 중이다.
작년 오컷에 있는 쉼터가 첫번째 지원자를 받았다. 2년 동안 한 지역 쉼터에 살았던 그녀는 온전히 혼자 쓰는 방과 공동욕실 대신 뜨거운 물이 수시로 나오는 공간을 가진다는 사실에 몹시 흥분했다.
이후 33세부터 70세에 이르기까지 총 7명의 입소자를 받았다. 이 여성들은 나라에 헌신했지만, 실업, 학대, 빈곤, 중독 그리고 살 집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우리는 이들이 직업을 구하고 아파트 같은 영구주택을 마련할 수 있도록 퇴역 군인 서비스 기관에 연결해 주었다. 무엇보다 이들에게 안전하고 협력적인 공동체를 제공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나는 여전히 장기적인 비전에 전념하고 있다. 신생 비영리단체라면 으레 고질적인 재정 문제를 겪게 마련이다. 오컷의 쉼터와 목장의 대출금을 갚아 나가는 일은 큰 부담이다. 나는 돈을 다루는 일보다 손을 쓰는 일에 더 능숙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기부를 요청하는 것은 내 몸에 밴 가르침에 반하는 일이다.
하지만 배우고 있다. 퇴역 후 힘들었던 시절을 되돌아보면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음을 느낀다.
누구나 도움을 필요로 한다. 특히 퇴역 군인들은 더욱 그렇다. 그중에서도 여성 퇴역 군인은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 이 사실을 배울 수 있어서 그리고 배운 대로 살 수 있어서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말씀드렸던 것들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축복을 느낀다.
'가이드포스트(Guideposts)'는 1945년 노먼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해 미국에서 창간된 교양잡지로, 한국판은 1965년 국내 최초 영한대역 잡지로 발간되어 현재까지 오랜 시간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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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가이드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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